[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배우 송일국이 소극장 연극 무대에 섰다. 데뷔 20년 만에 처음 선 소극장 무대 위에는 이렇다 할 무기가 없다. 마이크도 없이 맨손으로, 자신의 목소리와 연기만으로 관객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럼에도 송일국은 기꺼이 도전에 나섰다.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지난달 24일 개막한 연극 '대학살의 신'(연출 김태훈)은 두 소년이 놀이터에서 싸우다 한 소년의 이빨 두 개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때린 소년의 부모인 알렝과 아네뜨가 맞은 소년의 부모인 미셸과 베로니끄의 집을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연극이다.

송일국은 그간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최근 연극 '나는 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하며 무대 나들이에 나섰던 그가 또다시 연극을 선택했다. 전작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최정원의 추천이 큰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무대에 서 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고, 관객을 만나는 일이 너무 재밌다"는 그다.

선배의 추천을 받아 호기롭게 도전했지만, 처음에는 소극장 무대가 주는 부담감이 상당했다는 송일국이다.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연기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만큼 대사가 객석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걱정이 컸고, 실제로 동료 방송 연기자들의 연극 무대를 보며 관객의 입장에서 이 같은 문제점을 느꼈었기에 연습 전에 느끼던 공포감도 컸다는 것이다.

송일국은 "공포심을 이겨낼 방법은 연습뿐이었다"고 말했다. 베테랑 선배들 사이에 껴서 무조건 목소리를 크게 냈고, 그러면서도 감정을 깨지 않는 연습을 이어간 끝에 지금처럼 안정된 발성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연습을 통해 부딪히고 깨지고 나니 오히려 그간의 공포심이 날아가고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며 "첫 무대에서는 최정원 선배와 거의 '그분'이 오신 상태로 열성을 다해 공연했다. 그러고 나니 공포감이 날아갔다"는 뿌듯한 자랑도 이어졌다.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이제는 매일 있는 공연이 손꼽아 기다려질 정도로 무대가 재미있다고.

"첫 주말 공연이 끝나고 배우들끼리 기분 좋게 회식을 했어요. 상대역인 이지하 선배가 '처음엔 저 인간 데리고 어떻게 공연을 하나 싶었는데, 공연할 때쯤 되니까 봐 줄만 해졌다'며 칭찬을 해주셨어요. 후배로서, 배우로서 최고의 칭찬이었죠."


송일국은 이번 극에서 피해자 소년의 아버지 미셸 역을 맡았다. 베로니끄 역의 이지하와는 부부로, 알렝 역의 남경주, 아네뜨 역의 최정원과는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춘다. "동아연극상에 빛나는 이지하 선배, 뮤지컬 계의 전설 남경주, 최정원 선배와 함께 하니 나만 열심히 하면 됐다. 오랜만에 팀에서 막내가 돼서 선배들 사주시는 밥을 얻어먹으며 열심히 연습을 했다"며 너스레다.

극은 교양을 한껏 뽐내며 가면을 쓰고 서로를 응대하던 부모들이 서서히 민낯을 드러내며 벌이는 '썰전'을 한 시간 반 동안 펼쳐낸 블랙 코미디다. 서로를 향한 막말과 이와 상반된 가식적인 행동은 위화감을 자아내 웃음을 유발하고, 한 걸음 나아가 위선적인 인간의 본성을 풍자한다.

그중에서도 미셸은 아내의 편을 들며 다정한 남편을 연기하지만, 실상은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파탄자에 허세가 가득하고, '아이를 낳고 나면 결혼은 재앙이다'라는 대사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철이 덜 든' 남자다. 실제 송일국과는 거리가 먼 인물처럼 보이지만, "결혼 전 철이 들기 전에는 나도 미셸보다 더 한 사람이었다"며 말문을 연 송일국이다.

"20대 때는 답이 안 나올 정도로 '지질한' 사람이었어요. 대학 입시를 4년 동안 준비하면서 어머니 속도 많이 상하게 하고, 오죽하면 저 같은 아들을 낳을까 봐 자식도 낳기가 싫었죠. 그런 제가 아내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나서 뒤늦게 철이 들었어요.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면서 따뜻한 아빠로 이미지가 좋게 포장됐고요. 어떻게 보면 인생이 또 하나의 코미디죠."


송일국은 자신이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린,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어머니를 따라 할아버지의 기념사업회 일을 10년 거들다 보니 뒤늦게 철이 들었고, '조상의 덕을 내가 보는구나' 싶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운을 사회에 어떻게 환원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는 그다.

고민의 답을 '기본'에서 찾았다는 그는 "내 일에 충실하고, 내 가정을 잘 지키고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때문에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편,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목표가 됐고, 목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모습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녹아든 것 같다는 그다.

'사랑도 노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인간 송일국의 모습은, 무대에 임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 송일국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무대에 설 때마다 모든 공연을 녹화해 철저히 복습을 한 끝에 겨우 지금의 무대까지 올 수 있었다는 송일국. 여전히 공부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현재 목표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이미 소극장 무대에 도전했다는 것, 선배들 사이에 어우러져서 제대로 대사를 말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학살의 신'에 출연하며 세웠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한 회, 한 회 달라지는 감정을 잡아 디테일을 살릴 시간이에요. 분명한 건 매일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번 공연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좋아지는 것, 그게 지금의 목표입니다."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