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양지원 기자] 날이 갈수록 세상은 점점 편해진다. 가족이나 애인, 그리고 친구들에게까지 손편지를 쓴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세상은 '스마트'해졌다. 흔히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봐도 모두들 스마트폰, 또는 태블릿PC에 취해있다. 나와 주변인이 아닌 지나가는 행인의 모습 따위는 궁금하지 않고, 만남에도 박해졌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SNS를 통해서 모든 게 이뤄지는 세상이다.

영화 '그녀'(her, 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이러한 세상에 너무나 익숙해진, 외롭고 고독한 남자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사랑과 성장 이야기를 담았다. 테오도르는 글재주가 탁월한 인물로, 다른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작가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과 헤어진 테오도르는 반복되는 일상이 공허하고 외롭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컴퓨터다. 그러던 어느 날 테오도르는 호기심에 인공지능 운영체제(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를 알게 된다.

테오도르는 본능적으로 사만다에게 깊이 빠지게 된다. 자신의 우울함을 달래주고,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비록 '몸'이 없는 무형의 인공지능 체제일 뿐이지만, 인격체를 지닌 사만다의 매력에 흠뻑 취하고 만다.

테오도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만다에게 바깥 세상을 구경시켜 주고, 친구들에게도 스스럼 없이 'OS 여자친구'를 소개한다. 사만다는 그런 테오도르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한다. 메일을 읽어주고, 컴퓨터의 잔업을 처리하는 사만다는 출판사에 테오도르가 썼던 대필 편지를 보내고, 테오도르의 재능을 인정한 출판사는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그러나 어떤 사랑이든 권태는 피할 수 없는 걸까. 테오도르는 점점 사만다에 대한 불만이 쌓인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도 않은 사만다가 자신에게 잘 보이려 내는 사람 흉내, 그리고 대역(?)을 쓰면서까지 자신과 신체접촉을 시도하는 사만다에게 혼란을 느낀다.

결국 이들은 한 차례 이별을 맞이한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인격체는 사만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다시 만남을 이룬다. 어렵게 결실을 맺는 듯 싶었으나, 어느 새 또 테오도르와 사만다 앞에는 피할 수 없는 이별이 기다린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이 아니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미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았을 정도로, 탄탄한 작품성을 지닌 영화다. 사만다의 목소리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은 제 8회 로마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영화는 치밀하게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현대인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게 살고 있는 듯 해 보이지만, 실상 공허함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모습을 촘촘하게 그려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타이트샷 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게다가 도시를 가득 채운 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LA가 영화의 주 배경으로 쓰이는데, 인간의 고독함과 절묘하게 대비를 이루며 감탄을 자아낸다. 게다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상황과 절묘하게 떨어지는 아름다운 음악들이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대사들 역시 영화의 묘미다.

호아킨 피닉스와 '형체 없는' 스칼렛 요한슨의 호연 역시 돋보인다. 호아킨 피닉스는 아집에 사교성까지 부족한 주인공 테오도르를 내공이 돋보이는 연기로 소화했다. 사만다를 잃은 호아킨 피닉스가 정처 없이 질주하다 지하철 역 앞에서 넘어지는 장면은 가히 손을 꼽을 만한 명장면이다.

스칼렛 요한슨 역시 목소리 연기 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테오도르를 위로해주는 따뜻한 '그녀' 사만다부터 필요에 의해 사라지는 인공지능체제의 슬픔까지 희노애락을 오가는 목소리로 감탄할 만한 연기를 펼쳤다.

인간과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사랑을 다뤘다고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면 그런 편견이 싹 사라진다. 존즈 감독은 소통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가 하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이냐고 되묻는다. 남녀 간의 사랑을 떠난 사랑이야기가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묘하게 닮았다. 22일 개봉.

[티브이데일리 양지원 기자 news@tvdaily.co.kr/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