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한길 기자] 최근 11년 만에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이재명 대통령의 만남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를 넘어, 한중 관계의 변곡점을 기대하게 했다. 특히 만찬장에서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장이 "베이징에서 K-팝 공연을 열자"는 제안을 건넸고, 시 주석이 이에 긍정적으로 화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업계는 술렁였다. 2016년 사드(THAAD) 사태 이후 9년째 이어져 온 '한한령(限韓令)'의 해제 가능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 한한령 9년, 단절이 남긴 깊은 그림자

'한한령'은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제도는 아니지만,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사실상 한국의 드라마·음악·영화 등 대중문화 콘텐츠를 제한해 온 비공식적 금지 조치다. 당시 중국 내 방송사들은 한국 예능의 판권 구매를 중단했고, K-팝 가수들의 공연 허가 역시 연달아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됐다.

이 조치는 단순한 문화교류 제약을 넘어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입혔다. 한류를 중심으로 성장해 온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잃게 되자, 음원·콘텐츠 유통·광고·굿즈 판매 등 수익 구조가 크게 흔들렸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중국을 통해 쌓은 매출과 팬덤의 연결 고리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그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런 만큼 이번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교류 확대와 다양한 분야의 협력 복원 의지를 보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업계에선 "교류 문이 다시 열릴 수 있다"는 변화의 조짐으로 읽히고 있다.

JYP, 하이브, SM, YG

◆ 기대와 신중함 사이, 업계의 미묘한 온도차

한중 정상회담 이후 K-팝 업계는 들뜬 분위기와 동시에 절제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번엔 진짜일까?"라는 기대감이 커지는 한편, "아직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실제 공연이 허가되고 관객 3천 명 이상 규모의 무대가 열리기 전까지는 '해제'라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내 한류 공연이 '현지 사정'을 이유로 갑자기 취소된 사례가 반복되면서, 업계는 더욱 신중해졌다. 지난 8월 그룹 케플러(Kep1er)의 푸저우 콘서트가 한 달을 앞두고 무기한 연기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특별한 이유는 모른다"고 했지만, 업계는 "비공식 규제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케플러

그럼에도 기대감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중국 공연시장은 수십조 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이다. 만약 한한령이 완화된다면, 단순히 K-팝 공연뿐 아니라 음반 수출·OTT 콘텐츠 유통·브랜드 협업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높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현재로서 공식적인 해제보다 더 중요한 건 중국 당국이 문을 열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며 "이번 정상회담이 그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룹 갓세븐(GOT7), 몬스타엑스(MONSTA X) 등과 작업한 '히트 메이커' 정성민 작곡가는 "최근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간 문화 교류의 물꼬가 트이는 것에 대해 매우 고무적이며,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정부에서도 대중문화교류위원회를 설립해 K팝에 많은 지원을 모색하고 있고, 박진영 위원장과 시 주석의 만남 같은 상징적인 소식은 분명히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기대했다. 다만 "한한령 해제는 장기적으로 낙관적이긴 하나 단순하지 않고, 실질적인 대규모 K팝 공연 허가나 방송 및 콘텐츠 유통 규제 완화와 같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기때문에 성급한 기대보다는 다음 단계에 나아가기 위한 움직임을 기대하며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밝혔다.

박송아 대중문화평론가는 "한중 정상회담 이후 K팝 업계의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지금의 흐름은 확실한 해빙보다는 조심스러운 회복 조짐으로 보는 게 맞다. 일부 공연 추진과 교류 논의가 감지되지만, 본토 내 대형 콘서트나 전시가 본격적으로 재개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정부 간 대화 복원과 현지 플랫폼의 관심이 서서히 살아나며, 한류 재진입의 온도가 조금씩 오르고 있다. 한한령은 여전히 정치, 외교적 변수에 따라 작동하는 비공식 규제지만, 이번 정상회담은 닫혀 있던 문화 교류의 문이 다시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업계는 홍콩·동남아 등 인접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 기반을 넓히고, OTT나 콘텐츠 협업 등 비공연형 확장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지금은 성급한 낙관보다 방향을 세밀히 조율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번 회담은 한류가 다시 중국 시장으로 향하는 서서히 데워지는 신호로 읽힌다"고 전했다.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 모습.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 다음 스텝은? 균형과 확장의 전략

한한령이 완화되거나 실질적으로 해제된다면, 그 파급력은 단순히 공연 산업을 넘어 한국 문화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것이다. K-팝 공연이 재개되면 티켓 판매, 팬덤 비즈니스, 굿즈 유통이 즉시 활성화되고, 드라마·예능·영화 등 K-콘텐츠 산업 전체의 회복세가 기대된다. 또한 K-뷰티, 패션, 식품 등 연관 산업에도 긍정적 연쇄효과가 예상된다.

그러나 업계는 이번 변화의 흐름을 막연히 '중국 진출 재개'가 아닌'균형 잡힌 확장 전략'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미 미국·유럽 시장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K-팝 산업은 중국을 '다시 열릴 수 있는 옵션 시장'으로 인식하며 준비 중이다. 이와 관련 한 기획사 관계자는 "한중 관계 개선에 대비하면서도,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투트랙 전략'이 이제 표준"이라고 강조했다.

서울호서예술실용전문학교 엔터테인먼트계열 김예나 교수는 "한중 정상회담 이후 긍정적인 흐름은 분명하지만, '한한령 해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중한 시선이 필요하다. 한국 대중문화는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확고한 기반을 갖춘 만큼, 중국과의 관계 흐름에 지나치게 휘둘리기보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교류를 꾸준히 이어가며 다양한 분야에서 점진적으로 협력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순간의 변화에 기대기보다 상호 신뢰를 쌓아가며 장기적인 교류의 흐름을 만들어 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문이 실제로 열릴지는 앞으로의 외교 흐름과 행정적 실행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 정상회담이 K-팝 산업에 오랜만에 '기대할 만한 변화의 신호'를 던졌다는 사실이다. 업계는 지금, 그 신호를 신중히 분석하며 조용히 다음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티브이데일리 김한길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출처=박진영 SNS, WAKE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