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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티비데일리 &gt; 전문가칼럼</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section.html?section=4</link>
<description>티비데일리</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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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아나운서 ‘임현주’의 참된 외모 사용법 [윤지혜의 대중탐구영역]</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897812761540476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시대의 목소리라 불리며 대중의 시선을 받는 자리에 놓인 아나운서에게 외모는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연예계로 진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외모가 갖는 차별점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이슈를 전해야 하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특성상 요구받게 되는 신뢰성, 그저 표면적인 매력을 넘어 신뢰가 가는 얼굴이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아나운서 ‘임현주’가 안경을 착용하고 뉴스를 진행한 일은 아나운서로서의 외모를 최대한 활용한, 영민한 예로 볼 수 있다. 안경을 쓰고 뉴스를 보도하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 이렇게만 보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나 이게 특별하게 여겨진 이유는 한국의 여성 아나운서들 중 누구도 안경을 착용한 채 데스크에 앉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경험하지 못한 장면이기에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할 생각도 없었던 것. 여성 아나운서들이 연예인의 것만큼 혹독한 미의 조건을 요구 받아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까. 물론 안경을 쓰지 않는 혹은 못하는 모든 여성 아나운서들이 이러한 조건에 얽매여있다 볼 수는 없다. 안경을 착용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여, 보통의 우리처럼 렌즈를 사용하거나 시력교정술을 선택할 뿐인 경우가 대다수일 테니까.
<@1>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인식의 변화다. 그동안 여성 아나운서들이 강도 높은 요구를 받아왔으나 그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겠다. 그러다 성차별에 대한 사회적 각성과 함께 성인지 감수성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고 인식하기 시작했는데, 임현주의 안경이 상징적인 첫 장면이 되어준 것이다.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다만, 결과적으로 임현주는 안경을 착용한다는 하나의 행위로, 사회가 겪고 있는 커다란 변화에 여전히 둔감한 이들에게까지 아나운서의 온전한 영향력이란 시대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며 이는 성별이 다르다고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진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이게 바로 대중이 진정 요구했어야 할 아나운서로서의 외모가 아닐까.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안경 쓴 그녀의 모습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까닭이다.

안경 착용 행위는 시작에 불과하고 임현주의 행보는 그 이후에 더 주목할 만하다. 출연하고 있는 어느 방송프로그램이 기획한, 하루동안 여성 출연자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남성 출연자는 브래지어를 한 채로 보낸 후 경험을 공유하는 ‘노브라 챌린지’ 제안을 받고선, 대중에게 노출되는 일정이 있는 아나운서로서는 쉽지 않은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응한 것. 덕분에 이전보다 많은 이들이 브래지어가 여성이 반드시 착용해야 할 필수품이란 사고방식에 대해 재고해보게 되었다.

아나운서의 외모에 심기는 신뢰는 이렇게 생성된다. 임현주는 누구보다 명확하게 이를 인지하고 직접 실현하는 영민한 아나운서다. 게다가 용감하다. 의도를 왜곡한,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한 기사들로 인해 쏟아진 수많은 악의적인 질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차분히 실상을 알리며 오해를 풀어나가니까. 게다가 이 과정을 통해 본래의 의도가 다시 한번 대중에게 알려지며 이중의 효과를 얻는다. 간만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나운서다운 참 아나운서의 등장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니스트 news@tvdaily.co.kr / 사진=MBC '라디오스타']]]></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니스트</author>
<pubDate>Mon, 18 May 2020 14:54:36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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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김혜수ㆍ장근석, 가족경영 폐해를 대하는 서로 다른 자세 [윤지혜의 슬로우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872688561536725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아역으로 데뷔하여 오랜 시간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부모의 지원과 지지는 필수다. 첫 시작부터 소속사와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문 까닭에 들어오는 수입이나 스케줄 관리 등을 제대로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즉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찾게 되는데 부모만큼 믿음이 가는 존재가 또 없다.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에 몸 담아온 스타들의 가족경영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 해 모친의 빚투 논란에 휘말렸던 배우 김혜수는, 모친이 일으킨 돈 문제가 처음이 아니며 꽤 긴 시간 반복되어 왔음을 밝혔다. 가진 재산을 휘몰아갈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지만 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갚아 왔다는 것. 그러나 돈으로 인한 모친의 선을 넘는 행동이 멈추지 않았고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결국 8년 전, 모친과 인연을 끊기에 이르렀다고. 

김혜수 또한 어린 시절 데뷔하여 매니저가 되어 준 모친의 보살핌을 받으며 활동을 이어 왔다. 누구보다 이르게 스타덤에 오른 그녀에게 모친이 곁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그 외적으로도 큰 힘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둘의 관계는 단순히 엄마와 딸이 아닌, 매니저와 소속 아티스트라는 엄연한 공적인 영역의 것이고 이는 그녀의 이름에 담긴 스타성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있어서 더욱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나야 했다.

안타깝게도 모친에게 이러한 구분이 제대로 인지되지 못했고 김혜수는 자신을 위해서도 모친을 위해서도, 그리고 영향을 받아왔고 받을지 모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모친의, 스케일도 참 컸던 돈 문제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초반의 그녀는 묵묵히 모친의 빚을 갚기까지 했으니, 제 몫의 책임은 지는 동시에 올바른 방향으로의 해결을 도모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하겠다.

그리하여 김혜수는 모친의 빚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비난을 받기보다 격려와 찬사의 대상이 된다. 이쯤에서 김혜수의 경우와 다소 비교가 될 만한, 장근석과 그의 모친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속사 대표와 소속 아티스트의 관계였던 둘은, 모친의 수십억 원대의 탈세 혐의로 현재 깨어진 상태다. 장근석 측의 입장을 전하면 본인은 전혀 알지 못했고 밝혀졌을 당시 신뢰가 깨질 만큼의 크나큰 충격과 상처를 받아서 결국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여 독자노선을 취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는 것.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바는 몰랐다고 해서 도의적인 책임마저 피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가족은 공적인 관계가 되기에 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 서로가 서로에게 경계가 되고 감시의 대상이 되어 사정 거리를 지켜주지 않으면 심각한 폐해에 빠지기 쉽다. 즉, 가족경영의 폐해가 어느 한 쪽의 잘못 만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알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모친의 혐의를 더욱 굵직하게 만드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도의적인 책임을 얼만큼 통감했는지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든 모친이 일으킨 물의에 대한 사죄의 말은 잊지 않긴 했다. 물론 관련 책임은 당사자인 모친에게 있음이 옳고 그게 또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괜스레 드는 아쉬움은, 그가 자신이 속한 회사의 운영에 좀 더 섬세한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가 ‘가족경영의 폐해’라 언급한 모친의 잘못을 사전에 바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바로잡을 때는 지났다 하더라도 김혜수의 경우처럼 소속 아티스트이자 가족으로서 제 몫의 책임은 다했다는 느낌은 줄 수 있었을 텐데, 싶은 거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사진=DB]


]]></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Sun, 19 Apr 2020 13:00:56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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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너를 만났다' 다큐의 존재 목적, 저희가 도움이 됐을까요? [윤지혜의 슬로우토크]</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812182871526606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증강현실 기법을 사용하여 과거 부모가 죽기 직전의 자신과 마주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현실에 덧입혀진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 과거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데 도움은 되겠으나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못한 실제적 과거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6일 방영한 VR휴먼다큐멘터리 MBC 스페셜 ‘너를 만났다’는 3년 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딸을 잊지 못하는 한 엄마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했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로 딸의 실제 모습에 최대한 근접한 3D 모델을 구현하여 엄마와 가상의 재회를 하게 한 것이다. 엄마는 만져지지 않는 아이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못다한 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탁 나오니까 되게 좋더라고요.”

엄마가 모를 리 없다. 눈 앞에 보이는 딸이 실제가 아닌 만들어진 허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직 실제 이미지를 따라잡을 만큼 기술이 진보하지 않은 탓도 있고 무엇보다 아무리 똑같이 만들었다 해도 어미가 어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겠는가(물론 그런 날이 언젠가 오겠다만 아직은 아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렇게 해서라도 다시 딸을 보고 끌어안을 수 있어서, 남아있는 마음을 건넬 수 있어서 좋았을 테다.

‘너를 만났다’는, 굳이 사랑하는 존재를 먼저 보낸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공통의 숙명을 지닌 사람이란 존재로서 우리 모두의 눈시울을 적신다. 사랑하는 딸을 무력하게 잃어야 했던 슬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고통을 그저 담담하게 감당할 뿐인 이들의 모습을 차분하고 꾸밈 없이 담아냄으로써 우리가 그 감정에 근접할 수 있도록 돕는 까닭이다. 
<@1>
아픈 기억이 되살아날 두려움보다 딸의 웃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한,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남기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가고 공감이 되니까,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또 빤히 보면서도, 3D 티가 나는 딸의 영상을 접하면서도 엄마와 함께 실제 딸을 만난 듯한 가슴 먹먹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어 우리가 상실한 소중한 사람들 혹은 함께 하고 있으나 언젠가 상실해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온전한 몰입이 만들어낸 소통의 과정으로, 평소에 하기 힘든 감정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보다 깊은 삶의 위로와 깨달음을 선사받게 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감동이 여느 드라마의 것을 압도하는 순간이다.

혹자는 반문할 수 있다. 허구의 것이 어떻게 진실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겠냐고. 하지만 허구의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노력이 모아졌다. 딸의 모습을 좀 더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백여명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수집하고 비슷한 체형의 모델을 촬영하여 실제 얼굴을 입히는 시도를 했으며 최대한 딸과 유사하게 움직이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모션을 땄다. 

결국 엄마의 마음을, 딸을 만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우리의 마음을 울린 것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몸과 마음을 모은 사람들의 노력이라고 하는 게 옳지 않을까. ‘너를 만났다’의 제작진이 딸을 만나고 온 엄마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다. “저희가 조금 도움이 됐을까요?” ‘너를 만났다’가 많은 이들의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인 동시에 다큐멘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Sun, 09 Feb 2020 12:18:07 GMT</pubDate>
</item>
<item>
<title>백종원, 다 큰 어른에게도 혼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스타공감]</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80776713152563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백종원’, 다 큰 어른에게도 혼을 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다 큰 어른을 혼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이 회사에서 이루어졌을 때는 꼰대 혹은, 희귀한 경우이긴 하다만 하극상이라 불리기 십상이고, 속엣말이 필터 없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가정에선 더더욱 하지 못할 일이다. 친구 사이엔 가능할까. 어느 정도 나이가 지나면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나 그녀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 잘못했다가는,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손절 당할 위험에 놓일 수 있다.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SBS ’백종원의 골목식당’(이하 ‘골목식당’)이 굳이 논란이 될 만한, 즉, 팍팍하거나 고집이 센 출연자를 등장시키는 이유가 백종원과 갈등을 빚게 만들어 화제로 삼기 위함이 아니냐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방송은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산업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닐 테지만 백종원이 한 회 걸러 화를 내는 장면을 보다 보면, 앞서 언급한 대목이 부차적으로 발생한 것일 뿐 주된 의도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현재 방영 중인 홍제동 문화촌 편에는, ‘골목식당’에서 역대급이라 할 만큼 무기력한 모습을 지닌 감자탕집 주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자관계로, 손님이 없을 때(대부분 없다) 엄마는 방에서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아들은 카운터에서 태블릿PC로 축구를 시청한다. 여기까진 장사가 잘 되지 않아서 그렇다 친다. 문제는 가게를 이어 받겠다는 아들이 장사를 준비하는 엄마 옆에서, 장사의 메인 요리인 감자탕 앞에서 취하는 방관자적인 태도다.

일하는 엄마를 무심히 쳐다보고 말거나, 앞치마를 갖추지 않음은 물론 겉옷도 벗지 않은 채 한쪽 손으로만 요리에 임한다. 백종원이 건넨, 매일 새벽시장에 나가 신선한 재료를 구비해 바쿠테(갈비탕과 비슷한 동남아 음식)를 끓여보라는 숙제에도, 굳이 시장까지 갈 필요 없이 냉동된 것으로도 충분하다며 본인의 방식을 고수한다. 아들이 그간 잘 풀리지 않는 장사에서 비롯된 권태와 게으름에서 벗어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길 바라는 목적으로 주어진 숙제였는데 전혀 짚어내지 못한 것이다.

담판을 지어야 할 필요를 느낀 백종원은 아들을 앉혀놓고 호되고 진심어린 충고를 한다. 요점은 이러하다. 억지로 하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른 일 알아보라고.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하는 게, 열정이 없으면 못 버티는 게 외식업이라고. 대신 좋아한다는 확신이 들면 그에 걸맞은 열정을 보이라는 것이다. “이 일이 내 체질에 맞고 해 볼 수 있는 거라면 바꿔야 할 것 아니에요. 나는 가만히 있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어떻게 주위가 변화되길 원해요!”

좋게 말해 충고이지 혼을 낸 거다. 더 큰 어른이라 해도 다 큰 어른을 혼 내는 일은 어렵게만 여겨지는 오늘의 세대에서 백종원의 날카로운 훈수는 어떤 결과를 거두었을까. 놀랍게도 백종원의 말에 아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엔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자존심이 상했을 지 모르겠으나 이내 누구도 해주지 못한, 본인에게 너무도 필요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지나온 궤적을 제대로 되짚기 시작한다.

한층 더 흥미로운 결과는 백종원은 감자탕집 아들만 혼냈을 뿐인데 그것을 시청하는 모든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상황의 다 큰 어른들이 함께 영향을 받더라는 것이다. 덩달아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을 했다 할까. 때때로 다 큰 어른에게도 혼을 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주변에서 단순한 꼰대적 마인드가 아닌, 진심어린 훈수로 혼을 내 줄 더 큰 어른을 찾기가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그런데 백종원이 이 역할을 해준 거다. 간접적이라 해도 강렬한 경험이다. 좋은 분노는 보편적인 특성을 가져, 편히 앉아서 누워서 보고 듣던 우리까지도 어느새 해당되는 관점을 제시한다. 물론 그가 꾸준히 진정성을 획득해 왔기에 가능한 결과다. 화를 내는 백종원이 ‘골목식당’의 시청률을 높인다면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사진=백종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04 Feb 2020 09:38:3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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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활동을 중단하는 아이돌 스타, 무엇이 그들을 멈추게 하는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800224231524072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데뷔하자 마자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한 해에도 꽤 많은 아이돌이 연예계에 발을 들이려 하나 그 중 소수만 간택될 뿐 대부분은 좌절하고 만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양면이 존재하는 법일까. 스타덤에 올라 이제 앞날의 걱정은 좀 덜었다 싶은 아이돌들 사이에, 아이러니하게도 심리적 불안 증세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복에 겨웠다, 배가 불렀다 비난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만 보기엔 상황은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지난 달만 해도 ‘이달의 소녀’의 ‘하슬’과 ‘몬스타엑스’의 ‘주헌, ’오마이걸’의 ‘지호’가 불안 증세를 호소했고 이 전에는 ‘트와이스’의 ‘미나’, ‘세븐틴’의 ‘에스쿱스’, ‘우주소녀’의 ‘다원’, ‘스트레이키즈’의 ‘한’, ‘강다니엘’ 등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여기에 각 해당 소속사들의 대처는 알맞았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게 하고 몸의 회복상태에 따라 복귀 시점을 결정하겠다 하니, 소속 아티스트들이 처한 심리적 위기 상황을 단순히 성격적인 부분의 예민함이나 순간의 엄살로 대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처사다. 아무래도 요 몇 년 사이에 마음의 병이 몸과 삶에 가하는 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경험한 까닭에 소속 아티스트들을 실펴보는 눈에 좀 더 힘이 실린 것이라 하겠다.
<@1>
왜 유독 요즘 들어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돌 스타들이 많아졌을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늘어난 SNS 및 각종 콘텐츠의 이용 빈도로 인해 대중과의 접촉점이 다양해지고 많아졌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덕분에 대중은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아이돌과 소통할 수 있고 아이돌 또한 이전보다 더욱 다각화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대중은 아이돌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을 쉽게 추적하며 일일이 찬사를 보내거나 혹은 비난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돌 스타는 자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과거의 삶의 어떤 순간이 일으킬 지 모를 파장 또한 매순간 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찬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야 더없이 좋은 일이나, 사람의 인생에 어떻게 잘못 하나, 실수 하나 없을 수 있겠나. 이것이 비난 쪽으로 방향을 틀 때는 그 파급력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특히 운이 좋아 데뷔와 함께 스타덤에 오른 이들은, 자리가 갖는 의미를 채 소화하기도 전에 수많은 눈과 입의 반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격이다. 당시엔 그저 꿈에 그리던 스타라는 입지가 주는 흥분에 자각하지 못하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화려함이 드리운 장막이 거두어지고서야 비로소 수많은 시선과 목소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를 소화하는 법도, 감당하는 법도 모르겠는 몇몇 이들은 결국 마음의 병을 얻고 마는 것이다.

즉, 사회적 소통의 방식과 양상이 달라지면서 연예계가 처한 상황이 바뀐 결과다. 문제가 발생된 후의 대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문제를 예방하는 것이다. 이제 각 소속사는 변화된 사회적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여 소속 아티스트들의 성공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만큼 스타의 자리에 올랐을 때 겪을 정신적 혼란을 돌볼 시스템. 전문 심리 상담자를 따로 배치하는 등의 방법을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아이돌, 아직 어린 스타들임을 기억하여 섬세한 손길을 건네어 더 이상의 잃는 일이 없길 바란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사진=DB]]]></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Sun, 26 Jan 2020 16:07:03 GMT</pubDate>
</item>
<item>
<title>‘사랑의 불시착’, 배우의 매력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문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95658161523140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때때로 우리가 맞닥뜨리는 어떤 이야기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해당 세계로 끌어당긴다. 분명 허구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의 혹은 그녀의 삶을 살아보고 싶게끔 만든다. 비현실을 현실로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 상황, 이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다. 이야기의 실재를 가늠해보게 하는 주인공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연출 이정효, 극본 박지은)의 리정혁(현빈)과 윤세리(손예진)가 그 대표적 예다. ‘사랑의 불시착’은 남한에서 재벌가의 상속녀이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패션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여자 윤세리가 업무상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북한 관할의 비무장지대에 불시착하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북으로 넘어가지만 이 과정을 통해 북한의 특급장교 리정혁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다소 허무맹랑하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충분히 유치하게 볼 수 있단 소리다. 북한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로맨스이다 보니 무게감은 현실의 남북관계가 갖는 것보다 덜하고 무게가 덜어진 자리에 낭만적 요소들이 끼어들어 작품의 비현실성은 극대화된다. 이러한 설정과 이야기의 배경이 시청자들을 납득시킬 만큼의 개연성을 함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사랑의 불시착’이 갖는 설득력은 그 수준에 이르진 못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런 사실은 현빈과 손예진, 플롯의 허점을 완벽히 메우고 있는 두 배우의 존재다. 특히 손예진은 갑작스레 북으로 불시착해 버린 윤세리의 당황스러움과 절망감,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괴리감 없이 그려낸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몰입을 위한 노력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별 다른 어색함이나 어려움 없이 그녀가 만들어내는 윤세리를 따라갈 수 있다. 

혹 오해하지 말 것은 그렇다고 윤세리란 배역이 표현하기 쉬운 인물은 아니라는 거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겁모습이 다라면 그리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내면에 지독한 아픔을 지니고 있어 한 때 죽음까지 생각했으나 결국 이겨낸, 북한에 좌초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유머와 웃음을 잃지 않는, 강인한 존재다. 

예로 어떤 이에게 끌려가 갇힌 상태에서 음식을 거부하며 하는 말이, 자신은 간헐적 단식으로 단련된 몸이라는 게 아닌가. 덕분에 시청자들은 웃지 못할 장면인 줄 알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상황의 심각성과 유머 코드, 위기에 대처하는 윤세리만의 특출 난 능력 등, 균형을 잘 맞추지 않으면 자칫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 윤세리를, 손예진은 자신만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완벽히 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북한말을 멋들어지게 구사하는 현빈은 대중에게 북한 남자의 이미지를 새롭게 정립 중이다. 간첩이나 잔악한 꾀를 품고 있는 권력자, 가난한 차림의 사람 등, 여태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바 이런 모습이 다인 우리에게, 권력층에 속했음에도 심성이 곧고 바르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줄 모르는, 잘생긴데다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리정혁’과 같은 이도 존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에게 푹 빠진 사람들은 실재할지 모를 현빈같은 실제 리정혁을 향해 애꿎은 환상을 품고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이제 ‘사랑의 불시착’은 그것에 빠진 사람들에게 더 이상 유치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다. 현빈과 손예진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리정혁과 윤세리를 살아 있는 인물로 만들어, 그들이 사는 세계 또한 저절로 현실성을 획득하게 된 결과다. 두 배우의 힘이 작품의 미심쩍은 부분들까지 매력으로 압도한 것이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이야기의 완성도에 얼마나 커다란 비율을 차지하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는 경우라 하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사진=tvN]]]></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21 Jan 2020 09:16:5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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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코의 ‘아무노래’나 일단 틀어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95028171522976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지코의 ‘아무노래 챌린지’가 만들어가는 ‘아무노래’의 활약이 심상치 않다. 한 번 들어도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와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안무가 적절한 데다 재미까지 있는 홍보 효과와 맞물리니, 덕분에 ‘아무노래’의 안무는 현재 ‘인싸춤(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 ‘인사이더’들이 추는 춤)’으로 등극하고 있는 중이다.

지코의 신곡 ‘아무노래’의 안무를 따라 추는 ‘아무노래 챌린지’는, 그가 자신의 SNS에 마마무 ‘화사’와 함께  춤을 추는 영상을 올리며 시작되었다. 물론 그들이 춘 춤은 ‘아무노래’의 안무 중 하나다. 비교적 간단한 동작들로 구성된 까닭에 개개인이 가진 멋을 마음껏 얹어볼 수 있는데 여기에 해당 스타의 영향력이 더해져, 화사를 비롯한 몇몇 스타들과 함께 한 영상은 금새 많은 이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그 중 제일은 이효리다. 무엇을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녀답게, 그녀의 ‘아무노래 챌린지’ 영상은, 그것도 자발적으로 게시된 그 영상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평소 노래에 관심이 없던 대중의 호기심마저 단번에 압도해 버렸다. 그녀의 영상 이전에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즉, 이제는 알만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아무노래’와 ‘아무노래 챌린지’를 알게 되었단 것이다.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스타의 영향력이 ‘아무노래 챌린지’가 파급효과를 갖는데 큰 힘이 되었단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은 오늘의 대중은 연예계의 일에 어느 정도 노련해져서 유명인이 취했다고 무작정 받아들이진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엔 그러할지 모르나 매력이 없는 콘텐츠는 금방 알아채는 게 또 대중의 속성인지라 결국엔 시들시들해지고 만다.

원천이 좋기 때문에 스타의 영향력도 소용이 있다는 소리다. 쉽고 따라 부르기 좋고 편안한데 흥이 난다, 슬쩍 보면 별 뜻 없는 아무 말이나 늘어놓은 것 같지만 제대로 노래를 겪으면 사이사이로 흘러나오는 왠지 모를 격려가 있다. 그저 함께 아무렇게나 춤을 추고 웃다 보면 겪고 있는 힘든 일도 별 일 아난 것처럼 느껴진다 할까. ‘아무노래’가 지닌 매력이다.

엄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춘다는 것, 노동요를 태곳적 조상으로 둔 대중가요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던가. 놀랍게도 ‘아무노래’는 노래 자체로서도, 노래가 일으키는 파장으로서도 이를 완벽히 실현해내고 있다. 단순히 이벤트를 진행하고 유명 스타들이 그에 응했다고 해서 ‘인사춤'이 된 것도, 각종 음원사이트에서 최상권을 차지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아무노래’가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한 결과다.

“모두가 아무 걱정 없이 2020년을 보내는 데 이곡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지코의 ‘아무노래’는 아무 노래가 아니다. 우리의 현실을 비집고 들어와 웃음과 흥이 담긴 위로를 건네는 몇 안 되는 ‘아무노래’다. 아무 걱정 없이 한 해를 보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생긴 걱정을 웃음과 흥으로 덜어내는 데에는 지코의 ‘아무노래’가 더없이 큰 보탬이 되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20 Jan 2020 15:46:5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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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동백꽃 필 무렵’에서 ‘환상동화’로, ‘배우 강하늘’의 영민한 행보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91497991522295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브라운관에서의 화려한 성공은 더 이상 무대 위에서의 시간을 마련하지 못하게 한다. 우선 시간을 내기 어렵고, 매순간 대중의 시선이 집중되는 스타의 대열에 들어서다 보니 브라운관 혹은 스크린의 거침 없이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는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백꽃 필 무렵’으로 최고치의 주가를 올린 배우 ‘강하늘’의 행보가 놀라운 것이다.

‘동백꽃 필 무렵’의 열기는 현재 연극 ‘환상동화’로 뻗어나가고 있다. 강하늘의 출연 소식이 알려진 까닭으로, 그가 나온다는 회차는 대부분 매진되어 어떻게든 표를 구하기 위한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하고 있는 중이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이렇게 ‘환상동화’를 접한 이들의 재관람률이 상당히 높다는 거다. 처음엔 강하늘 때문에 보았다가 극 자체의 매력에 빠져 또 다시 무대를 찾게 되는 사람이 대다수란 소리다.

잠깐 소개하자면, ’환상동화’는 각각 사랑과 전쟁, 예술의 기치를 내건 세 명의 광대들이 나와 관객에게 들려주는, 한스와 마리라 불리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 두 남녀의 사랑이 어떻게 예술이라는 환상을 창조해내고 현실로부터 구원을 받는지 담아냄으로써, 인간의 존재가치와 그가 지닌 삶의 의미를 잘 녹여낸 작품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극이 무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 광대가 시종일관 재기발랄하게 움직이며, 관객들의 웃음과 눈물을 쏙 빼낸다. 그래서 이야기의 완성도는 세 광대의 연기력에 달려 있는데 강하늘이 이 중 사랑광대를 맡아 배역을 온전히 소화하며 작품의 내외적 성과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지도에 의한 홍보효과와 연기력, 작품성의 완벽한 매치다.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다 보니 ‘환상동화’에서 강하늘이 책임져야 할 대사와 움직임의 양은 엄청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수없이 무대 위에 서본 베테랑이라 해도, 관객들과 마주하여 연기를 펼쳐야 하는 연극 무대는 어찌 되었든 긴장의 연속이다. 게다가 ‘동백꽃 필 무렵’ 후 거의 공백 없이 오르는 무대다. 부담감이 적지 않을 수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동화’를 선택한 데에는, 6년 전에 관객으로 보았을 당시 더 큰 배우가 되어서 꼭 해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좋은 작품이란 확신 때문이겠다. 

사실 이 대목이 놀랍고 감탄을 자아낸다. 좋은 작품과 연기를 향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만만치 않은 양의 노력이 들어가는 작품을 연달아 할 수 없을 테니까. 배우에게 있어 탁월한 연기력과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능력은, 재능도 재능이지만 성실한 열정과 진정성 어린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취할 수 없는 자질이다. 기회는 이 자질 위에 찾아오고 머무르기 마련이며, 이미 한바탕 누린 자라 해도 또 다시 제 은혜를 허락한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 ‘환상동화’로 이어지는 강하늘의 행보가 영민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대중은 덕분에 즐겁다. 강하늘이 아니었으면 ‘환상동화’라는 멋진 작품을 접하지 못했음은 물론,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이 아닌 무대 위에 놓인이야기가 지닌 힘을 깨닫지 못했을 게 분명하니까. 배우다운 배우는 좋은 작품에 참여하여 좋은 연기력으로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할 줄 안다. ‘환상동화’에 이후엔 또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배우 강하늘의 다음 걸음이 궁금하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16 Jan 2020 13:43:1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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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승수(스토브리그)와 고하늘(블랙독)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8989901152182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와중에는 사연을 팔아 사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에서 후자는 특히 중요한데, 사연을 잘 팔아야 시청자들의 공감과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파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 독특한 행보를 보이는 드라마 속 두 인물이 있다. ’스토브리그’의 ‘백승수’와 ‘블랙독’의 ‘고하늘’이다.

백승수(남궁민)와 고하늘(서현진)은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티 내지도, 티를 내야 한다 해도 구구절절 읊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의 사연을, 그 사연으로 인한 감정의 움직임을 알고 싶어 애가 타는 쪽은, 오히려 시청자들이다. 그들이 지닌 매혹적인 성품의 근간이 분명할 그 사연이 너무 궁금하여 혹은 더 깊이 알고파서 이미 던져진 떡밥을 물고 추측에 추측을 더할 따름이라 할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걸까, 저는 그 답을 꼭 찾아야겠습니다.”

고하늘의 경우 초반에 밝혀졌다. 버스 전복 사고로 죽을 뻔한 그녀를 살리고 생을 마감한 교사가 실은 기간제여서, 비정규직이어서 그 어떤 예우도, 보상도 받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죄책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살아온 인물이었던 것. 이 충격적인 경험은 그녀가 교단에 서고자 했던 이유이자 위기의 순간마다 다시 일어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해당 사연은 한 번 강렬히 등장한 이후로는 이야기의 전개에서 굳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형성된 성품을 지닌 하늘이 기간제 교사로서의 삶을 단단히 이고 가는 것을 보여줄 뿐, 비극적인 기억이 주로 하기 쉬운 실수인 애꿎은 감성 팔이를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저 보는 이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녀가 취하는 선택이나 태도들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바탕만 깔아준 것이다.

 백승수는 고하늘의 것과는 상반된 방식을 취한다. 드라마에서 1막이라 할 수 있는 분량이 지나가고 나서야 그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으니까. 건조한 말투와 쉽게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표정 탓에 첫인상은 차가웠으나, 이야기가 전개되고 몇 개의 에피소드를 지나오면서 느껴지는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뭔지 모를 따뜻한 마음이었다. 

시청자들은 백승수의 사연이 더욱더 궁금해질 수밖에. 조금씩 단서들이 나오긴 하나 백승수라는 인물 자체가 속을 내보이는 스타일도 아니고 드라마 또한 그의 사연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묻어 있는 정도를 훑어볼 따름이다. 그러다 그와 깊은 관계를 지닌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입을 빌려, 현재 사연이 형체를 갖추는 데 박차가 가해진 상태다.

“저같은 사람이 아이를 안아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동생이 심각한 부상으로 그만두게 되면서 아버지는 쓰러지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 모든 상황을 홀로 책임져 왔다. 돈만 많이 주면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하고 효율을 따지며 온 힘을 기울여 냉철하게 굴다가도, 선수들의 아픈 속내에 깊은 연민을 내비치는, 알다가도 모를 그의 모습은 유독 책임감 강한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단장으로서 본격적인 시작을 앞둔 순간, 백승수가 드라마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것도 제대로. 다른 이가 건넨 갓난아이를 받아 안으며 뜨겁고 굵은 눈물을 흘린 것. 시청자들이 그간 원래의 모습을 더듬어가며 하나씩 맞춰 온 사연의 조각들이 이 지점에서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장면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겠다.

스스로 찾아 알게 하는 것, 심지어 당사자들은 제 일만 할 뿐 굳이 드러낼 생각도 없다. 보는 이들로서 이만한 희열이 또 없다. 하지만 이의 전제 조건은 사연을 알아내고 싶을 만큼 해당 인물이 충분히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거다. ’블랙독’의 ‘고하늘’과 ‘스토브리그’의 ‘백승수’가 허구를 넘어 실존하고 있는 인물로 느껴질 정도로 성공적으로 구현화됨으로써 한층 더 성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작전이란 소리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14 Jan 2020 17:18:21 GMT</pubDate>
</item>
<item>
<title>‘고은아’의 폭로 아닌 폭로와 ‘우리’의 반응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8619887152096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어떤 폭로가 단순한 흥밋거리인지 정당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그가 이끌고 오는 파동을 보면 된다. 작은 공동체이든 큰 공동체이든 얽혀 있던 문제가 풀릴 실마리를 얻는다거나 잘못된 관습이나 관행이 바로잡힌다거나 작고 큰 권력 구도가 일으키는 은근한 갈등이 해결될 기미를 보인다거나 등등,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파동을 내고 있다면 해당 폭로는 존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일인 방송이 활약을 펼치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선 화제가 될 일이 많고 많다. 사람들의 구미만 당길 수 있다면 지나간 옛 추억이나 사랑도, 흔히 먹던 밥 한 끼도 다수가 공유하는 하나의 에피소드이자 사건이 된다. 하지만 방송이 그렇듯, 이는 편집한 사람의 시각이 철저히 스며 든 상태의 것으로 진위여부가 확실치 않으나, 보고 공유하는 사람들은 단편적인 진실의 모습에 혹하여 호기심 어린 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배우 고은아가 동생 미르의 유투브 채널 ‘미르방(MIRBANG”)을 통해 밝힌 촬영장 비화, 즉, 타배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일이나 기껏 준비한 시상식 드레스를 빼앗긴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우선 그녀에게 가혹하게 군 누군가를, 아마도 유명했고 지금도 유명할 여배우의 신상을 지속적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까닭이고, 인간의 고약한 호기심으로 볼 때 각자 상상하는 인물이, 그녀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이의 얼굴과 일치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겠다.

게다가 한번쯤, 직장에서 혹은 학교에서 유사한 일을 겪어보았다면 감정적 동의는 더욱 거세진다. 당시 억울하고 분했던 심정이 곱씹어지며 고은아의 고충이 한번에 이해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할까. 그리고 어떤 정의감 같은 것이 불쑥 올라오는데, 그리하여 호기심과 함께 소환된 옛 기억은 맹렬한 복수심으로 희열을 찾아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하고 엄청난 화제성을 일으키며 수많은 후보자들, 애먼 피해자들을 양산한다.

여기서 우리가 되짚어보아야 할 바는 고은아가 자신이 겪은 연예계의 실상을 알린 것은 어떤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함도 아니고 압도적인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또 다른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함도 아니라는 거다. 연예계의 분위기를 바꾸어 본다거나 이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저 그녀 개인의 시선이나 감정에 의한 판단으로 과거의 ‘썰’을 풀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흥밋거리가 애꿎게 문제적 상황으로 변한 것으로서, 폭로의 가장 험악한 예다. 이러한 폭로는 빈 수레가 요란한 격으로 논란만 한바탕 크게 일으킨 후 해당 영상의 조회수만 높인 채, 그 과정에서 몇몇 상처받은 이를 남긴 채 시간과 함께 모습을 감춘다.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얽혀 있을 수도 있는데, 화제성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것이다.

혹자는 고은아의 폭로가 연예계 내의 불합리한 권력구도를 공론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개인사이고 개인의 인간관계에 관한 것일 뿐 그 어디에도 공론화가 될 만한 거리는 없다. 결국 그녀의 이름이 검색어 순위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현상은, ‘폭로’라는 것에 있어 진위여부나 사안의 정도는 개의치 않고 자극적인 화제를 취하는 데 급급한 우리가 만들어낸 웃픈 상황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조혜인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10 Jan 2020 10:31:27 GMT</pubDate>
</item>
<item>
<title>‘봉준호'의 수상 소감이 시사하는 것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86191671520950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한국 영화의 경쟁력을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현재 ‘기생충’의 수상보다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건 봉준호의 수상 소감, “우리는 영화라는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Cinema)”이겠다.

지난해 열린 제 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상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받은 황금종려상을 시작으로 봉준호와 ‘기생충’이 거두고 있는 성과는 2020년에도 계속되고 있다. 자막 있는 영화, 그러니까 외국어영화에 박하다는 북미 지역에서 흥행에 성공함은 물론이고 오스카상으로 가는 길목이라 여겨 봄직한 골든글로브까지 수상했으니 그야말로 세계 영화의 판을 뒤흔드는 중이다.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더욱이 봉준호의 짧고 굵은 수상 소감이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영화의 세계에서도 강대국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영어를 쓰는 나라의 것, 블록버스터들의 주된 탄생지인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 영화라 할 테다. 때마다 가장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는 작품을 떠올려보면 대번에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실로, 외국인 우리나라가 이러할진대 본토인 미국은 어떠하랴.

굳이 자막을 보고 읽는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부의 소리를 향한 호기심이나 변화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마음은 빈틈을 만들거나 퇴보를 가져올 따름이다. 그들이 모국어로 된 영화를 보는 것에만 치중할 때 그 밖의 나라들은 밀고 들어오는 타국의 것들을 보아야 했는데, 그 덕에 자신과 다르고, 또 다양한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들을 접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두명이 아닌 다수의 대중에게 영화를 보는 눈이 생겼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레 걸출한 감독과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할까. 다양한 세계와 시대를 아우르는 좋은 작품은 어느 날 불쑥 고개를 내민 한 두명의 천재에 의해 무작정 나오지 않는다. 해당 시대의 사람들 혹은 그 이전의 사람들부터 뿌려온 거름을 기반으로 딱딱한 한계를 뚫고 나와 무럭무럭 성장한 어느 천재의 손에 맺히는 게 바로 ‘기생충'과 같은 걸작품이니까.

즉, ‘기생충’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 초청되어 나가 우리와 다른 사고방식과 문화권에서 자란 이들의 마음을 공감시킨 유수의 작품들은 실은, 상황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게, 어쩔 수 없이 매번 뛰어넘은 1인치 정도의 장벽이 선사한 선물인 게다. ‘나’가 보고 듣고 겪는 것만이 전부라는 확신이 깨지면서 가능하게 된, 세계 속 다양한 ‘나’와의 소통이 낳은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틀은 언제 어느 때고 있으며 틀은 깨본 사람이 결국 깬다. 그리고 깨본 사람들은 안다.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오해하지 말 것은 어떤 특정 지역만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다. 상황이 그러했을 뿐 우리 또한 언제든 동일한 입장에 놓일 준비가 되어 있고 어느 면에서는 이미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 존재가 ‘공통적'으로, 틀을 깨고 장벽을 뛰어넘는 작업을 성가시게 여기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란 진실을 매순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봉준호의 “우리는 영화라는 하나의 언어를 쓴다”는 말이 단순한 수상 소감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의 내부에 스며 드는 이유이리라.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10 Jan 2020 10:19:27 GMT</pubDate>
</item>
<item>
<title>‘양준일 신드롬’, 오늘의 시간을 입었던 과거가 제 자리를 찾기까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7696281518437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가 아닌, 시대의 현실에 좌절을 겪은 가수가 되돌아왔다는 건, 단순한 ‘레트로(복고주의, 복고풍)’라 볼 수 없다. 해당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세대에서 분 바람이라면 더더욱. 그래서 ‘양준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양준일’의 이야기는 ‘뉴트로(복고를 새롭게 해석하는 경향)’의 관점에서 볼 수 있으나, 그보다 좀 더 특별한 게 있다.

91년 싱글앨범 ‘리베카’를 발매하고 활동을 강제종료 당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는 양준일은,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19년, 강제소환되어 돌아온다. 유투브 채널 ‘온라인 탑골공원’에 그가 활동했던 무대들이 게시되면서, 약 30년 전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만큼 세련된 패션과 춤, 신선한 풍의 노래 등이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끈 결과다.

놀라운 건 그의 무대에 관한 기억이 있을 수 없는, 그러니까 동일한 과거를 공유하지 못할 세대의 환호까지 받고 있단 사실이다. 특히 이 세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대 위에서의 행위는 물론이고 무대 밖에서의 모습 또한 가장 앞서나가는 것을 취하도록 잘 다듬어진 아이돌그룹에 익숙하다. 그런데 50대에 들어선 옛 가수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니, 그의 무대 자체가 과거의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오늘의 시간을 입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하여 양준일은 JTBC ‘투유 프로젝트- 슈가맨 3’을 통해 현실 속 무대에 첫 발을 내딛게 되는데, 대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시간여행자인 양, 그 때와 다름 없는 흥과 감각, 매혹적인 무대매너를 선보여 69년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영상으로만 보던 것을 실제 눈 앞에서 본 사람들은 그 감회가 더욱 컸겠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이 뿐만이 아니다.

그의 굴곡 진 삶의 이야기다. 수십 년이 흐른 후에 들어도 좋을 만큼의 음악은 당시에는 그만큼 낯설고 익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양준일의 것은 환영보다 거절의 시선을 더 많이 받았으며 미국 교포 출신이라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까지 미움의 이유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는 지점이 찾아오는데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다. 당시 그의 비자를 담당한 이가 양준일의 존재 자체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이나, 수용력이 없는 사회가 지니기 마련인 가혹한 우둔함이라 해두자. 몰랐던 거다. 이렇게 30년이나 흐른 지금, 무려 2020년을 눈 앞에 둔 이 때 사람들이 양준일을  불러낼 줄은. 그것도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복기하는 과정이 아니라(솔직히 추억을 떠올릴만큼의 시간 자체를 허락해주지 않았으니까), 시대를 앞서간 과거가 제 시간을 찾는다는 의미에서일 줄은. 

흥미롭게도 이러한 양준일의 삶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더라는 것이다. 어떤 위로라면 시대가 개인에게 좌절을 안길 수 있어도 의미 있는 시간마저 사라지게 할 순 없다는 것, 시대를 관통하는 옳은 운명이 의미를 지닌 순간을 기어코 찾아내어 어느 때고 제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우리가 진실하게 만들어온 생의 순간들은 시대나 사회가 헛되다 해도 결국 제 의미를 찾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다. 

“더 이상 과거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오늘의 시간을 입었다는 이유로 시대에 짓눌려 있던 과거의 재등장과 세대를 아우르는 사람들의 환영, 옳은 운명은 생각보다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어, 진심어린 순간들을 그냥 묻어두거나 지나치지 않는다. 그저 뉴트로로서만 해석하기에 부족한 ‘양준일 신드롬’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송선미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31 Dec 2019 14:20:28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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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람 박나래는 나빠도 예능인 박나래는 선한 웃음 주겠다’, 그녀는 수상 소감마저</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6788221518030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박나래’의 대상 수상에 유독 축하의 마음이 이는 것은 ‘솔직히 이 상은 제 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받고 싶었다’는 수상 소감 때문이다. 이는 한 해를 최선을 다해 살아낸 이들이 그 결산이라 할 수 있는 기회에서 낼 수 있는 욕심이어서, 노력의 결과를 얻었으니 대상의 부담감보다는 한동안 수상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

박나래가 ‘2019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3년 만에 대상을 수여했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안 나오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수고한 시간들이 최고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148센티의 작은 몸으로 주어지는 역할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다 해내며 그의 성과까지 확실하게 끌어오는 그녀를 볼 때마다 놀라웠다. 쉽게 말해, 언젠가부터 그녀가 나온다면 해당 프로그램만큼은 재미가 보장될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나 혼자 산다’를 짚어내지 않을 수 없다. 프로그램의 중심이 되었던 전현무와 한혜진이 안타까운 사연으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게 되면서 위기론까지 제기되었을 당시, 그들의 자리를 대신한 이가 박나래였다. 다른 멤버들과 합을 맞추며 때로는 엄마처럼, 친구처럼, 언니와 누나처럼, 철없는 동생처럼 세심히 채워나가니 시청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채 느낄 새가 없더라.

여기서 돋보였던 그녀의 강점은, 그러니까 유머 외에, 융화력이다. 패션은 다소 과해도 어떤 사람이 와도 금방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편하게 대하고 다가갔으며, 탁월한 유머감각과 재빠른 상황 파악 능력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일조하여 함께 하는 멤버들 모두(일회성으로 출연한 이들까지), ‘나 혼자 산다’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도왔다.

여기에 기존의 멤버들이 꾸려내는 ‘나 혼자 산다’ 고유의 분위기가 더해지니, 새로이 합류하는 멤버들은 있는 그대로의 매력만 실어 내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더라. 이는 자신이 돋보이기 원할 수밖에 없고 원하는 게 당연한 방송계에서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나 자세 없이는 쉽지 않은 일로, 그녀가 자신의 위치와 해야할 일에 성실한 사람이어서 더욱 가능했다. 덕분에 ‘나 혼자 산다’는 다수의 연예인들에게 가장 출연하고 싶은 프로그램으로 꼽히고 있는 중이다.

“사실 저는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예능인 박나래는 TV에 나오면 저의 말, 행동 하나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박나래는 나빠도 예능인 박나래는 선한 웃음 줄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을 일으키는 게 선한 영향력이란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 내뿜을 수 있다는 건데, 이 세상에 온전히 이타적이고 온전히 착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이기적이고 어느 정도 악한 존재인 까닭이다. 선한 영향력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위선이나 기만 없이 드러낼 줄 알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에 성실히 책임을 질 때 생성되기 마련이다.

박나래는 이미 수많은 ‘선한 웃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건넸고 우리는 그것에서 최선의 즐거움과 성실한 재미를 만끽했다. 우리가 그녀의 대상 수상을 납득하는 바인 동시에 ‘너무 받고 싶었다’는 진실한 수상 소감에서 어떤 당위성마저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 하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30 Dec 2019 13:07: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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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대중은 왜 ‘김구라’의 ‘쓴소리’에 반응했는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6746931518022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어느 때보다 연말을 장식하는 방송프로그램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가수들은 미비한 무대장치로 다치거나 애써 준비한 무대도 채 보여주지 못하고 내려 오거나 해야 했고, 예능인들은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짓는 시상식에서 예능인답지 않은 재미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 어쩌면 매년 같은 방식으로 연말 프로그램을 만들어온 각 방송사에 건네는, 경고에 가까운 하나의 신호일 수 있다.

동시다발적으로 문제적 상황이 발생하고 심지어 그것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다면 해당 맥락과 관련된 영역에 전반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가요대전 혹은 가요대축제의 안일한 진행과정, 그리고 진부한 구색맞추기식의 연말 시상식을 두고 벌어진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실은 몇년 전부터 작은 소동처럼 일어나고 있던 중이라 할까. 

가수들의 순위를 매기는 방식 대신 들어선 가요대전 혹은 가요대축제의 형식은 다양한 그룹의 가수들이 협업하여 다채로운 무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준비하는 시간은 항상 촉박하고 연말에 방송되는 만큼 대중의 인식에 각인될 수 있는 화려한 무대는 또 만들어야 하고, 가수들은 거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겠단 결심으로 무대를 준비하고 위험을 불사하며 무대에 오른다. 

시간이 촉박한 건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도 마찬가지, 애초부터 좀 더 이른 시점에서 준비를 시작하면 좋으련만, 성급하고 황급히 일을 진행하다 보니 미처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곳이 생기고 안전 및 방송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방송가 사정이 여유를 줄 리 없다는 건 안다. 그러니까 이제 이러한 사정에 변화를 가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예능인의 잔치인 연예대상은 예능인의 잔치답지 않게 재미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김구라의 ‘콘텐츠 없이 개인기로 1,2시간 때우는 거 하면 안 된다’는 말마따나 방송의 구성 자체가 고작해야 진행자와 후보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말재간이나 특별 공연, 그것을 보는 예능인들의 어색한 표정 정도로 이루어져 있으니, 지루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부터는 상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공동수상도 하나 둘 늘어나면서 어떤 이가 상을 받게 되는지 대중의 관심마저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몇년 째 반복되는 별 내용 없는 진행방식은 진부해지는 게 당연하며, 후보자들을 잔뜩 정해놓고 그들의 영향력을 시청률로 연결시켜보겠다는 계산 또한 힘이 없어질 수밖에 없다. ‘연예대상도 물갈이를 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다’는 김구라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단순한 불평이나 꼬투리잡기가 아닌, 쓴소리로 느껴졌던 이유이리라.

어떤 말이 다수에게 쓴소리로 느껴졌다는 것은 그들 모두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는 의미다. 즉, 그의 발언을 향한 사람들의 크나큰 관심은, ’김구라’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용이 공감을 이끌어낸 결과라 하겠다. 다수의 대중이 연말 프로그램에 변화가 필요함을 인지하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당 방송사들은 시청률은 물론이고 신뢰도가 더 큰 폭으로 하락하기 전에, 요 근래 일어난 갖가지 논란들을 그냥 넘기지 말고 세세이 되짚어 재정비와 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와중에 희망적인 것은 ‘2019 MBC 방송연예대상’이 보인 진부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인기를 얻고 있는 각 예능 프로그램의 특징이나 출연자의 매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방송의 사이사이를 재미지게 이어나갔는데,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내년이면 데뷔 30년차가 되는 유재석에게 ‘유산슬’로 신인상을 수여해 많은 이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뿐만 아니다. 과거 음주운전 사건으로 인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던 ‘노홍철’에게 최우수상의 영예를 허락해 본인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작게라도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의 돌파구를 만들지 않을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30 Dec 2019 11:58:1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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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이제 ‘스토브리그'에겐 ‘Dead End(막다른 길)’란 없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597397151781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처음엔 배우 남궁민의 연기력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백승주의 얼핏 냉정한 듯 보이나 가슴이 따뜻하고, 잃고 얻고의 기준만 뚜렷한 듯 보이나 인간미를 중시하는 모습이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드라마 자체다.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연출 정동윤, 극본 이신화), 낯설 수 있는 소재를 배우의 연기력으로 시선의 포문을 연 뒤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좋은 예다.
‘스토브리그(stove league)’, 야구 용어로 ‘스토브’는 프로 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 즉,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 기간을 의미하며 이러한 스토브를 둘려싸고 팬들이 평판을 한다는 데서 ‘스토브리그’란 말이 탄생했다고 한다. 야구를 좋아하고 잘 아는 사람들은 익숙할 터이나 일반 대중에겐 낯설고 생소한 단어임은 분명하다.

드라마에 있어 무패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남궁민과 나오는 족족 시선을 강탈하는 배우 오정세의 출연이 아니었다면 쉽게 손대지 못했을 드라마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앞으로의 시청률이 결정되는 4회까지의 이야기에서, 그래서 가장 중요한 구간이기도 한 도입부에서, 이해하기 쉽고 따라가기 쉬운 전개방식과 속을 알 수 없던 인물인 단장 백승수(남궁민)가 프로야구단 드림즈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보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직스런 행보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자연스레 이곳저곳에서 터진 입소문은 본격적인 전개인 5회에 이르러 흥행의 급물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특히 4회와 5회에 걸쳐 이루어진 용병을 데려오는 에피소드는 와중에 압도적이었는데, 안그래도 빠져들어가고 있는 시청자들을 ‘스토브리그’에 자리를 깔고 눕게 만들었다 할까. 배우의 연기력, 이야기의 전개와 완성도, 연출력까지 하나의 완벽한 합을 형성해냈기 때문이다.

백단장은 괴물 투수 마일스를 데려오려 미국에 갔다가 뜻하지 못한 변수를 만나 영입에 실패하고 만다. 그를 똑같이 눈여겨 보고 있던 펠리컨즈 단장 오사훈(송영규)이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까닭이다. 이후 만난 후보군 용병들도 누군가 이미 접선을 했다거나 혹은 볼 필요 없는 실력을 가졌다거나 하여 실패. 별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막다른 길 앞에서 백단장은 그저 담담하기만 한데, 원래 그런 인물이긴 하지만 그럴 상황은 또 아니라서 의뭉스럽기 그지없긴 했다.

이렇게 한껏 우리의 심장이 쫄깃해 졌을 때에야 비로소 드라마는 모든 이면의 상황, 알고 보니 백단장의 용병 스카우트 일을 도와주었던 코디 길창주(이용우)가 투수로서의 재기를 준비하고 있던 현직 선수였고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나 귀화로 인한 병역기피 논란이 있다는 것, 그러나 나름의 사연이 있고 성품도 좋고 성실하기까지 하여 그를 새로운 드림즈의 용병으로 선택했다는 것을 밝힌다. 그것도 돌아오는 비행기 에 오른 백단장이 좌석 내에 설치된 VOD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는 장면을 활용한, 아주 세련된 플래시백 기법으로. 

길창주에게 계약서를 건네는 장면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더 이상 볼 용병이 없어 돌아가는 길에 기름이 떨어져 차가 멈추고 말자, 길창주가 근처 주유소를 다녀오겠다며 나간 상황. 그 사이 백단장은 전화 한 통을 받는데 미리 요청해 둔 길창주의 징계해제가 받아들여졌다는 연락이다. 때마침 길창주가 기름을 사들고 돌아오자 백단장은 준비해온 계약서를 건네고, 길창주는 놀라움과 감격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그 앞에는 ‘Dead End’, ‘막다른 길’이란 뜻의 말이 적힌 표지판이 서 있다. 백단장도 길창주도, 막다른 길에서 새 길을 찾은 것이다. 아무도 길이라 생각 못했던 새로운 길을.

엄청난 연출력 아닌가. 별다른 말 없이, 에피소드와 관련된 장면 하나 만으로 드라마가 추구하는 바와 세계관이 제대로 표현되었다. 어디서 비롯된 연출인지는 몰라도 하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이야기에 완벽히 몰입하고 있고 서로 좋은 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각 배우의 연기력은 물론이고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마저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매력이 뒤를 탄탄히 받혀 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했던 결과일 테니까. 

이제 시청자들은 누구 때문도, 무엇 때문도 아닌 ‘스토브리그’가 좋아서, 그 안에 담긴 세계와 사람들이 좋아서 본다. 그 뻔하다는 러브라인 하나 딱히 없고, 어쩌면 익숙하지 않을 ‘스토브리그’의 세계와 이야기에 마음이 설레다니, 참 놀라운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지닌 강력한 힘으로, 고작 5회 방영에 제대로 물이 오른 ‘스토브리그’엔 이제 ‘Dead End(막다른 길)’란 없겠다 싶다. 그저 앞으로의 시청률이 기대될 따름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SBS]]]></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Sun, 29 Dec 2019 14:29:57 GMT</pubDate>
</item>
<item>
<title>‘레드벨벳’의 컴백을 저지한 ‘안전 불감증’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429734151760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한 여배우는 사명감을 가지고 저예산 영화에 출연했다가 안전을 고려해 주지 않는 촬영장 상황에 ‘불행 포르노’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의 고통을 받는다. 좋은 작품을 위해 배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고 가수가 좋은 무대를 선보이기 위해 특출 난 준비를 해야 하는 건 맞지만, 해당 작품 혹은 무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연기를 할 수도,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출 수도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을까.

예술 영역에 속한 사람들은 종종 두려움을 무릅써야 할 요청을 받는데 명목은 사람들이 환호할 만한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러니까 대중이든 순수이든 예술이라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그 정도의 희생은 불사할 수 있어야 예술 좀 한다고 할 수 있고, 어찌 되었든 결과물이 좋으면 참여한 개인에게도 좋은 법 아닌가. 뭐, 대충 이러한 논리로 안전사항이 미처 확인되지 않은, 위험하고 불안한 상황에 투입시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말 경우가 좋지 않을 때에는 심적 혹은 육체적 상흔을 입는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만다. 앞서 언급한 여배우가 전자의 예고 후자의 예로는 얼마 전 무대 리허설을 하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리프트 장치에 올랐다가 추락해 부상을 당한 레드벨벳의 ‘웬디’가 있다. 병원으로 옮겨 정밀 검사를 받은 그녀에게 내려진 의사의 소견은 얼굴 부위 부상 및 오른쪽 골반과 손목 골절. 몸을 지속적으로 써야 하는 가수의 특성상 당분간의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볼 수 있겠다.

신곡 ‘Psycho(사이코)’로 컴백하고 고작 하루 만에 벌어진 사고로, 팬들의 아쉬움도 아쉬움이겠지만 활동을 위해 그간 치열하게 애쓰고 노력했을 당사자와 멤버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몸의 회복이란 게 재촉한다고 빨리 되지 않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라, 아마 완전한 회복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원래의 컨디션에 근접했다 싶은 상태에서 활동을 재개할 가능성도 높겠다.

퍼포먼스의 무리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무대 장치의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했다. 즉, 아티스트의 안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살펴 보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문제적 상황이란 이야기다. 물론 제작진 또한 예기치 못한 실수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본래 가진 태도나 사고방식은 이러한 작은 사례에서 드러나기 마련이고(심지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작진이 평소 무대 위 아티스트들의 안전을 제대로 존중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짚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처한 상황이나 사건의 발생 경위는 달라도 여배우가 토로했던 고통을 불러일으킨 사정과 별다르지 않다. 결국 안전 불감증의 문제인데, 더 깊이 들어가면 배우나 가수 등을 좋은 작품의 혹은 좋은 무대의 부속품, 다시 말해 상품으로 여길 뿐인 방송산업, 예술산업이 가져온 폐해다. 어느 산업이나 마찬가지이겠다만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어느 살아 있는 인간의 매력을 재료로 장사를 하는 곳이다 보니 경계 자체가 제 정신 차리고 붙들지 않으면 모호해지기 십상인 까닭이다 

배우의 열정에 따른 연기적 상황이 아니고서는, 모든 위험천만한 방향의 촬영은 요구되어서도,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설사 원해서 한다 하더라도 배우의 안전을 위한 철저한 대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수를 비롯하여 무대에 오르는 모든 예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몇 번이고 정비하고 확인된 상태의 무대에만 설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의 귀중한 자산인 몸이 다치는 일이 없게, 제 2의, 제 3의 웬디가 나오지 않게 최선을 다해 애써야 하겠다. 웬디의 완전한 쾌유를 기원한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DB]]]></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27 Dec 2019 15:55:34 GMT</pubDate>
</item>
<item>
<title>‘VIP’, 삶을 갉아먹는 욕망의 근원에 대하여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322966151720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종영한 SBS 드라마 ‘VIP’(연출 이정림, 극본 차해원)는백화점 상위 1% VIP고객들을 관리하는 전담팀을 배경으로 그곳에서 머물거나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크고 작은 욕망과 그 근원에 관한 것으로, 드라마의 첫 시작이 유독 자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행복한 아내이자 능력 있는 직장 여성인 여자 주인공 나정선(장나라)이 남편의 내연녀를 추척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용의 자극성에 내연녀를 찾아가는 과정을 마치 스릴러 장르의 한 장면처럼 담아낸 연출력이 더해지니 ‘VIP’는 극 초반부터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시청자들은 용의선상에 정선과 함께 근무하고 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올려놓고 그들을 탐색해 가는 즐거움을 취했는데, 영민하게도 드라마는 이 과정에서 각 인물들이 지닌 사연이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들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욕망의 정체를 밝히게끔 만들었다.

정선의 직장 동료이자 친구인 현아(이청아)는 남편과 잘 알고 지낸 사이이며 정선에게 밀려 승진에 실패한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가장 강력한 후보로 지목되었더랬다. 하지만 그녀의 삶을 깊이 파고드는 과정 중에 그저 하고 있는 일을 잘하고자 하는 야망 때문에 물불 안 가리는 열심을 다하다 그녀의 능력을 질투한 직장 상사에게 강간당할 뻔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 부모의 사업이 망해서 갈 곳이 없어졌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숨기고 있었다는 것 등이 알려지며 혐의를 벗었다.

그 다음으론 송미나(곽선영), 남편과 아이들 모르게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무언가 의뭉스러운 그녀의 행보는 정선마저 의심하게 만들었으나 알고 보니, 임신으로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도 일에 지장이 없도록 뛰어다닐 만큼 품었던 승진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더라. 서글픈 사실은 동료들을 배신하면서까지 뛰어다녔는데도 돌아온 건 직장 상사(현아의 강간미수범과 동일)에게 이용당했다는 자괴감과 성추행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정선이 찾던 남편의 내연녀,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를 얻는 것에 눈이 멀었던 온유리(표예진)이자 하유리를 이야기할 차례다. 누군가의 어긋난 욕망에 의해 태어난 그녀는 ‘혼외자’, ‘사생아’라는 딱지가 붙은 채 살아왔고 이는 그녀의 상처인 동시에 외롭지 않고자 하는 억눌린 열망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의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도 아랑곳 않는, 한없이 애잔하고 선한 얼굴이어서 더욱 잔인한 인물로 변화했다 하겠다.

그렇다면 정선은 욕망에 결백한가. 당연히 결백하지 못했다. 정선 또한 어린 시절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상처를 안고 있는 인물로 누구 하나 외롭지 않은 가정을 만드는 게 그녀의 목표이자 하나의 강박관념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정작 남편에게 듣고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소중한 사람을 잃는 파국에 봉착하는 것을 무력하게, 그러니까 단순히 분노하는 방식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등장인물의 상처와 그로 인한 욕망을 드러내는 재미에만 집중했다면 드라마 ‘VIP’를 영민하다고 하지 않았을 거다. 정선을 비롯한 그녀들은 욕망이 파놓은 굴레에 갇혀 있지만은 않기 떄문이다. 누구보다 용감하게 가려진 진실을 들여다 보고 무엇이 자신의 삶을 갉아먹어 왔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기존의 유사한 드라마들이 그려 왔던 백마 탄 왕자와 같은 남자의 도움을 얻는다거나 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여 그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는 작업도 서슴지 않았다.

현아는 미나가 자신과 동일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선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에서 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강간미수 사건을 공론화시켰고, 미나는 자신이 승진을 위해 불의한 요청에 응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리고 정선은 죽어도 용서하지 못할 것 같던 엄마를 찾아가 용서를 건넸고 유리는 정선의 남편에게 관계의 종료를 선언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VIP’가 자극적인 소재와 그러한 이야기의 전개방식을 취했음에도 존재가치를 획득할 수밖에 없었던 지점이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SBS]]]></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26 Dec 2019 10:16:0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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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기안84의 화보’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3225851517205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기안84’(김희민, 이하 ‘기안’)의 변신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그의 화보가 실린 해당 월호의 잡지는 품절되었다고도 하니 말 다한 셈이다. 패션에 있어서 문외한으로, 평소 수더분하게 다님은 물론 몸매에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던 그라서 보인 관심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그 수치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하다.

기안의 화보를 사들이려 하는 사람들의 욕구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기안에게, 아니 기안의 화보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부터 짚어보아야 하겠다. 유명 웹툰 작가인 기안은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면서 얼굴을 비롯한 자신의 본 모습을 더욱 알리게 되는데, 일상에서 보이는 그의 독특한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된 까닭이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의 기이한 행태, 즉 어떤 상황에서 보여야 할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아 한편으로는 경솔해 보일 수 있는 모습이 일부 대중에게 언짢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쉬워 보이는, 무시를 해도 괜찮을 만한 상대, 외모적인 매력까지 적은 상대라는 이미지가 작용하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더욱 홀대하게끔, 무엇을 해도 밉상으로 느껴지게끔 한 몫 했다 하겠다.

패션 감각은 좋지 않은 게 당연, 이런 기안과 슈스스(‘슈퍼 스타의 스타일리스트’의 줄임말) 한혜연이 함께 화보 작업을 한다니. 아무리 ‘슈스스’라 해도 무리한 도전이 아닌가, 도대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오지랖 넒은 걱정 반 기대 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플랫폼은 현재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라 할 수 있는 ‘나 혼자 산다’다. 화제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대중의 반응은 어떤 방향으로든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여기에 한혜연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과 하기로 한 거 제대로 해보자는 각오 아래 이루어진 기안의 노력이 좋은 결실을 거두며 좋은 기름을 부었을 뿐. 안그래도 누군가가 노력에 의해 외모에 변신을 가하는 일에 성공을 거두는 사건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항상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소식이지 않았나.

한혜연이 기안에게 입히기 위해 공수해온, 2020 패션으로 아직 국내에서 시판되기 전인 옷들도 힘을 보탰다. 화보를 찍는 순간만큼은, 그간의 기안이 지니고 있었던 패션과는 다소 어색한 이미지를 단숨에 씻어내고 흡사 트렌드 세터(시대의 풍조나 유행 등을 조사하는 사람, 선동하는 사람)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화를 못하면 말짱 도루묵일 텐데 소화마저 잘 해내어 사람들의 열띤 흥분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 

즉, 이 모든 조건들이 맞물려 현재의 품절 대란 상태를 이끌어냈고 기안은, 의도한 것인진 모르겠으나 자신의 웹툰 ‘패션왕’을 떠올리게 하는 행보를 걷게 되었다. 물론 기안은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아니, 내면으로서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겠지만, 이 한 번의 짙은 경험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벽히 바꾸어 놓은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대부분의 우리는 호감 어린 눈빛을 장착하고 그가 본래 잘생긴 편이었고 피치컬 또한 나쁘지 않았다며 그의 화보가 실린 잡지를 직접 접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을 따름이니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데이즈드]]]></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26 Dec 2019 10:09:45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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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그것이 알고 싶다’, 미디어의 힘으로 간절함을 증폭시키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1706571516912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존재 자체가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다. 방송산업의 구조가 지닌 상업성과 콘텐츠에 담긴 진정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은 합을 보이는 까닭이다. 즉,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일 만한 동시에 끌어야 하는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배치하며 취재나 보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선을 넘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이끌어낸다. 

미제 사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관심이 필요했다는 데 있다. 풀기 어려운 사건일수록 여러 사람의 간절함이 모여야 그 답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법인데, 대부분 피해자와 관련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시적인 간절함을 내뿜고 말 뿐이어서, 그 사이 잔혹하고 영악한 범죄자는 시간의 흐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만다. 남는 건,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향한 고통스러운 한과 죄스러움뿐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아직 고통 속에 머물러 있는 피해자와 가족들이 있다면 다시 끄집어 내어 미디어의 힘으로 간절함을 증폭시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사건을 대하고 파헤치는 그들의 태도는, 설렁설렁 대지도, 서투르지도 않는다. 웬만한 강력계 형사만큼의 능숙함과 성과를 보이니 사설 탐정같은 느낌마저 들 정도다.

이러한 능력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증폭시킨 간절함 덕분이다. 사건이 터질 당시에는 몰랐으나 범인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의 제보, 그로 인해 뒤늦게서야 가능하게 된 논리적인 상황 추론 및 재연 등이 ‘그것이 알고 싶다’의 시선을 더욱 정확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게다가 증폭된 간절함은 집요함을 낳기 마련이라 한 번 붙든 사건은 웬만해선 놓지 않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숨은 답 혹은 진실이 조금이라도 제 몸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설사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더라도 ‘그것이 알고 싶다’의 손에 닿은 사건들은, 그것이 어떤 동기에 의해서건 지속적인 화제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대중이 스스로 움직여 해결방법의 끄트머리에라도 닿을 수 있게끔 한다. 이때부터 미제사건은 시간문제로 진입하며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 묶인 것을 풀 때만 기다리면 된다. 

게다가 이들은 아직까지,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웬만하면 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굴하고 있는 대상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인데 바로 일반 대중,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다. 관심 어린 시선은 응원과 격려로, 시청률로 ‘그것이 알고 싶다’가 건재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외에도, 혹 편향적이진 않는지, 정의의 감각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실수한 부분이 있진 않은지 등등, 세세하게 관찰하고 되묻는 감시의 역할 또한 수행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한 번에 실현되지 않는다”, “정의는 때로는 천천히, 하지만 반드시 온다”, 그리하여 이러한 슬로건을 지켜내는 게 가능하도록 매순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한다. 화제의 중심에 있어 어떤 압력이나 유혹에 눌리고 넘어가기 쉬운 ‘그것이 알고 싶다’가 간절함이란 무게중심을 단단히 붙들고 갈 수밖에 없는 이유로, 해당 프로그램이 획득하고 있는 상업성과 진정성 사이의 균형이 여기서 기인하고 있다 하겠다. ‘그것이 알고 싶다’가 아주 오래, 우리 곁에 존재하길 바라고 바라는 바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SBS]]]></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24 Dec 2019 15:57:37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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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스타의 SNS, 지극히 사적이면서 공적인 공간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084679151669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스타의 ‘SNS'에 가하는 잣대는 어떤 모양새이며 어느 정도까지의 촘촘함을 갖추어야 할까. 애석하게도 그 기준은 정할 수 없다. 당시 그걸 접하는 대중의 마음의 온도에 따라 달라지니 모호하기 그지없다. 물론 도덕적인 선을 아주 뚜렷하게 넘는 경우에는 엄격한 비판이 가해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보통의 때에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이들의 일부에게 실망감을 얻거나 지지를 얻거나 둘 중의 하나다.

‘지창욱’이 개인SNS에 흡연 영상을 올린 게 사람들 사이에 논란 거리가 되었다. 개인의 일상을 올린 것이 무슨 잘못이 되겠냐는 입장과 영향력을 가진 스타로서 규제가 엄격한 흡연 장면을 거리낌 없이 내보내 청소년들에게 좋지 않은 예가 되었다는 입장이 대립한 것. 점점 커지는 소동에 팬 중 어떤 공동체는 성명서를 냄으로써 지창욱 대신 사과하는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전자의 입장을 좀 더 확대하여 들여다 본다면, 우선 흡연은 죄가 아니고 개인SNS는 엄연한 사적인 공간이다, 스타라고 규제를 당할 이유가 없고, 그렇게 시작한다면 스타들이 올리는 수많은 장면들 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우리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으며, 솔직히 이야기해서 굳이 그런 통로가 아니고서도 악영향을 받으려면 어디서든 받을 수 있다는 거다.

반면, 후자는 스타의 영향력과 그에 따른 신중함, 조심성에 집중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감을 신중하게 느끼고 있었다면 선뜻 하기 어려운 행동이라는 의미다. 분명 누군가는 SNS에 실린 그의 모습과 행동을 보며 동경하는 마음으로 따라해 볼 텐데, 호기심 이후의 선택은 당사자에게 달린 것이라 해도 그 시작점이, 동기가 지창욱이 된다면 어찌되었든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친 게 아닌가.

사실 이 논란엔 답이 없다. 양측의 의견이 모두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이 자유롭게 일상을 게시하는 동시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공간인 SNS 자체가 지닌 특이성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SNS만으로는 우리가 그곳을 온전히 사적인 공간인지, 공적인 공간인지 구분하지 못하며, 대체로 이러한 판단은 해당 SNS의 주인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좌표의 위치를 통해 내릴 수 있다.

즉, 사적인 공간으로 본다면 지창욱이 어떤 게시물을 올리든 우리는 관여할 수 없지만, 그가 현실에서 영향력 있는 부류인 스타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자연히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엔 공적인 힘이 부여되어 이번과 같은 게시물은 문제를 삼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흡연 장면이 아닌, ‘행복’이란 단어를 함께 둠으로써 흡연의 행위를 어느 정도 미화시킨 바도 없지 않으니 더욱 말이 많아질 수밖에.

요 근래 가수 ‘선미’ 또한 개인SNS에 올린 글과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그녀의 신체 일부를 가지고 수술을 운운하며 조롱한 사람들을 향해 던진 솔직하고도 재치있는 항변이었다. 그녀 나름의 강력한 입장 표명이 SNS를 통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로, SNS가 지닌 지극히 사적이면서 공적인 특성을 잘 활용한 결과다. 즉, 영향력이 큰 개인일수록 이러한 SNS의 특이성을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이용해야, 혹여 역풍을 만들어낼 위험을 피해갈 수도, 닥쳐온 것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도 있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조혜인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23 Dec 2019 16:04:39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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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가세연’에게 우리의 환심을 내주지 말기를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70833641516685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어떻게든 화제의 중심에 있는 것도 재주다. 자극적인 환심을 사 돈을 벌기 위한 재주. 문제는 그들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상관 없는 이를 추문에 휩싸이게 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정작 제대로 언급되고 문제시되어야 할 일들조차 그들의 천박한 입답에 휩쓸리어 출구 없는 난제로 봉착시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가로세로연구소’(이하 ‘가세연’), 답답함을 풀어주겠다 하지만 이들은 오로지 화제가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조악하고 천박한 콘텐츠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유명세가 가져다 주는 ‘부’이겠다.  그들에게 진실이 무엇이고 사람들의 말들이 낳은 어두운 안개가 어떤 상처를 안길 것인지는 상관없다. 그저 화제를 만들어낼 힘을 가진 이들의 유명세에 기생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접하는 대중은 세상엔 별 사람들이 있구나 하며 웃어 넘길 수 있다. 이토록 풍자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나. 이런 이들이 내뱉은 이야기가 화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현대 사회가 지닌 우스운 일면이니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화제의 당사자가 거짓 루머로 곤욕을 치르는 거라면 ‘가세연’이 어떻게 들쑤시고 다니든 상관없는 거 아닌가. 결국 진실은 밝혀지는 법인데.

하지만 ‘가세연’과 같은 존재가 일으키는 사태의 심각성은 꽤나 크다. 우선 현 대중사회는 특성상 하나의 사건에 너무 많은 시점이 관여하게 되면서 진실이 쉽게 모호해지고 밝혀지기까지 고통스러우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뿐만 아니라 모호성이 가진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우여곡절 끝에 진실이 본모습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겐 이미 중요치 않은 문제다.

진실이 천박한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그 힘을 잃어버리는 경우로, 매체의 발달과 함께 더욱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가세연’은 여기에 그들만의 조악한 숟가락을 얹어 한층 더 파헤쳐 놓기까지 한다. 아직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것들을 뒤섞어 진실을 더욱 모호하게 함으로써 진실을 미궁 속으로 밀어 넣음은 물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찾고 있는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게끔 만드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과정에서, 결국 밝혀지는 법이라 했던 진실은 상처를 입고 왜곡되어 더욱 깊은 곳으로 제 몸을 숨겨 버리기 마련이라 애꿎은 사상자들, 선의의 피해자들만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상처를 받은 이들에 대한 배려 하나 없는 아니면 말고 식의 들쑤심, 다른 이들의 유명세에 하이에나처럼 들러붙어 정의와 진실의 숭고한 가치까지 상업화시키는 ‘가세연’의 행위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소설 ‘레 미제라블’에 ‘테나르디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전쟁 중에 죽은 군인들의 호주머니를 뒤지고 아이를 볼모 삼아 가난한 어머니의 푼돈을 빼앗으며 사람을 사고파는 일도 마다않는다. ‘가세연’이 이와 별다를 게 없다면 너무 비약일까.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불행을 볼모 삼고 누군가의 유명세에 기생하여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것에 있어선 별다르지 않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그들에게 우리의 환심을 내주지 말자. 결정적으로 진실이 그들에 의해 모습을 드러낼 리는 없으니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유튜브 가로세로연구소]]]></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23 Dec 2019 15:42:44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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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겨울왕국2’, 비로소 겨울왕국을 완성하다 [무비노트]</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6721924151594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영화 ‘겨울왕국1’에서 ‘안나’(크리스틴 벨)는 ‘엘사'(이디나 멘젤)가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본연의 정체성을 거부하게 만든 계기였다. 주체가 안 되는 거센 능력이 동생 안나의 목숨을 위협한 순간부터 엘사는 꼭 맞는 장갑에, 성 안의 작은 방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 왔으니까. 자신의 정체성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헤칠 수도 있을, 악한 것이란 생각만큼 불행하고 고독한 게 없지 않나.

결국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켜 아렌델 궁, 그러니까 동생 안나의 곁을 도망쳐 나오던 엘사의 표정에 슬픔과 동시에 가뿐함이 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리라. 물론 그렇다고 엘사가 온전한 자유를 얻은 건 아니었다. 과거는 다 잊고 돌아가지 않겠다 외쳤지만 정작 그녀가 한 일은 자신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높고 날카로운 얼음궁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엘사를 얼음궁 밖으로 끄집어내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이끌어낸 이는, 다름 아닌 안나다. 닫힌 방문을 수없이 두드렸던 것처럼 언니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얼음궁까지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않다가 차가운 얼음덩이가 되어버린 안나를 눈물로 살려내는 과정을 겪으며, 엘사는 자신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두려움이 아닌 오직 사랑뿐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엘사 내면의 두려움을 인식하는 계기인 동시에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는 안나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했다 할 수 있는데, 솔직히 ‘겨울왕국1’의 안나가 지닌 역량은 작품의 흥행에 비해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엘사의 정체가 들통나게 된 게 하필 안나가 처음 만난 남자와 사랑에 빠져 억지를 부리는 바람이었고 하필 그 남자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인물이라 왕국 전체가 위기를 겪게 되었다. 

물론 안나가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을 줄여 이르는 말)가 된 건 어렸을 때부터 홀로 자란 영향도 크겠다만 작품의 한 축을 이끄는 주인공으로서는 매력을 느끼기 힘든 설정임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뚜렷하게 성장하는 부분이 없었다. 자연히 자신의 두려움을 깨고 나오는 성장을 이룬 엘사가 당시 많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영화 ‘겨울왕국2’는 이러한 아쉬움을 모두 날려 버린다. 안나가 언니 엘사를 따라, 천방지축이던 지난 날을 벗어나 누구도 잃고 싶지 않다는 내재된 사랑의 힘, 내면의 강력함을 끌어내며 제대로 성장한다. 마치 이걸 노리고 전편에 부족함을 남긴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아니, 이제야 완전한 ‘겨울왕국’이 완성된 느낌이라 할까. 

엘사도 마찬가지다. ‘렛 잇 고’를 외치던 그녀의 성장이 아렌델의 궁 안에서 끝날 건 아니었다. 초인적인 능력을 부여받은 자들이 으레 그렇듯, 엘사 또한 언젠가 자신이 지닌 힘의 근원이 부르는 목소리에 응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현재 누리고 있는 평안과 행복을 깨뜨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잃어버리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그녀는 운명의 부름에 응했고, 자신을 향한 동생 안나의 사랑의 도움을 얻어 온전한 성장을 이루어냄으로써 겨울왕국의 부족했던 혹은 비었던 부분까지 모두 꽉 채웠다. 전편만큼의 압도적인 매력을 원하는 이들에겐 ‘겨울왕국2’가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완성도만큼은 더욱 탄탄하며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 ‘겨울왕국1’을 보았다면 무조건 보아야 하겠다. 전편만 가지고서 ‘겨울왕국’을 말한다는 건 반쪽자리에 불과하니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영화 ‘겨울왕국2’ 포스터]]]></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19 Dec 2019 11:18:44 GMT</pubDate>
</item>
<item>
<title>연기란 이런 것, ‘먹방’으로 탐욕을 표현한 배우 ‘김갑수'</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6463491151502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탐욕이 인격화된다면 더도 덜도 말고 딱, ‘보좌관2-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하 ‘보좌관2’)의 송희섭이겠다. 국회의원이면서 법무부장관이었던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지만, 타고났는지 길러진 건지 남들보다 재빠른 상황 판단 능력으로 자신의 잇속을 차리는 데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것 같으면 그게 누구든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곤 했으니까.

막을 내린 ‘보좌관2’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의 원동력이기도 했던 송희섭 역은 배우 김갑수가 맡아 열연을 펼쳤는데 천박한 탐욕의 화신으로서의 어느 정치인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냈다. 특히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던 건 바로 그의 먹는 장면, 일명 ‘먹방’으로, 상황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는 특유의 게걸스러움으로 이기적인 욕망 그 자체로서의 송희섭을 수려하게 구현해냈다.

아무리 눈 치켜 뜨고 싸운 사이라 해도 같은 곳에서 일한 동료 정치인의 장례식장인데 애도는커녕 육개장 한 사발 제대로 말아 먹으며, 자신을 궁지에 몰아 넣으려 한 정치인을 협박하는 용도로 전어를 씹어 먹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씹어 먹히고 싶지 않으면 삭힌 전어처럼 지내라’는 대사까지 얹어 버리니  특히나 밥상머리 앞에선 상종하고 싶지 않은 위선마저 제거된 악인의 민낯이다.

송희섭에게 식사는, 단순히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식욕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배가 고프고 부르고는 상관 없다. 그저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욕심이 더 중요하며, 오로지 욕구를 넘어선 욕망으로 눈 앞에 놓인 음식들을 밑바닥 뚫린 위를 가진 거대한 괴수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댈 뿐이다. 실제적 배고픔이야 아득바득 고시를 통과하고 검사가 된 이후, 더욱 정확히는 재력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라진지 오래일 테니, 이제 그에게 배고픔이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법이다.

대단한 맥락은 이러한 의미를 완벽히 파악하여 표현해낸 김갑수의 내공 깊은 연기력이다. 단순히 못된 말과 악한 표정만 짓는 게 아니라 비릿한 눈빛에 순진무구한 미소를 장착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혀부터 날름거린다. 순진무구한 미소라니,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만 이는 어린아이가 보이는 악의 모습과 유사한 것으로 희섭이 지닌 악의 순전함을 더욱 강조하는 장치다.

차이가 있다면 어린아이의 악은 사회화되기 이전의 인간이 보일 수 있는 본성인 반면 희섭의 것은 배울 거 다 배운 다 큰 어른이, 악한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사회에서 학습한 모든 도덕적 성품과 선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제거한 결과라는 점이다. 즉, 희섭의 악은 본연의 모습을 넘어 한층 더 발달된 것으로 그의 입가에 어린 미소 하나가, 음식을 먹는 게 아닌 먹어치우는 모습이 우리에게 진득한 욕망이 내뿜는 잔혹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갑수가 만들어낸 희섭의 존재는 끝까지 진실된 악인이었다. 드디어 궁지에 몰려 절망할 차례가 왔는데도, 칼이 무디면 제 살을 깎는 법이라며 좌절하기보다 자신의 무기가 날카롭지 못했음을 한탄했고 살아온 생의 방식에 대해서는 한 치의 죄책감도 후회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몰락은 더욱 의미 있었고, ‘보좌관2’는 진정성을 끝까지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김갑수가 허구의 인물 송희섭으로 하여금 현실성을 잔뜩 머금게 한 결과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16 Dec 2019 11:31:3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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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두의 거짓말’이 남긴 ‘찝찝함’에 대하여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53537431511732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OCN ‘모두의 거짓말’(연출 이윤정 극본 전영신, 원유정)의 종영 이후 나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꼭 그래야만 했었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연인을 잃은 친구의 슬픔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가지고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 모든 것을 목격하게 하는 비극을 안겼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선 악마적 희생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을 끌고 갔던 핵심 에피소드, JQ그룹의 아들이자 신사업 대표 정상훈(이준혁)의 납치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땅을 오염시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절망에 이르게 한 아버지의 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벌인 자작극이었다. 손과 발이 잘리고 눈이 도려지는 고통에 이어 죽음까지 감수한 그의 희생이 아버지를 포함하여 관련된 모든 이들을 처벌 받게 했으니 가치가 있다면 있겠다.

하지만 통쾌하다기보다 허탈하고 무언가 잔여물이 남아 있는 듯 찝찝하다. 아무리 본인의 의지라고 해도,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 해도,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를 자르고 도려내야 했던 수의사와 친구를 죽이고 사체를 훼손하기까지 해야 했던 이가 겪었을 죄책감은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만큼 절박하고 막중한 사안이긴 했다. 

JQ그룹의 힘은 정치판에도 미쳐 있어 폐기물 투척 사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해도 사건을 파헤치는 사람들마다 회유되거나 죽음을 면치 못하니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을 터. 그리하여 정상훈은 JQ그룹의 회장이 가장 아끼는 아들인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내걸어 엽기적인 범죄 행위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세상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아무리 획기적인 게 필요했어도 굳이 그렇게 자극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했는지,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취한 잔혹한 방법가지 용인되어야 하는 건지. 인간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는 점에서 JQ그룹이 잘못을 덮으려 한 방식이나 정상훈이 취한 과정이나 비인간적이고 악마적이란 것에서 별 다른 차이가 없지 않나.

문득 드는 비극적인 깨달음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이란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상대하기 힘들만큼 부패하고 썩어 문드러져 있어, 선과 정의가 이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동일한 악마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은연 중에 사실로 동의하고 있는 이 같은 맥락이 ‘모두의 거짓말’에도 반영되어 자신의 신체를 덫으로 삼아버린 정상훈이란 인물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우리 사회와 그 속에 거하는 우리의 민낯이 모두 들켜 버린 느낌, ’모두의 거짓말’이 남긴 ‘찝찝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 악마적 희생이 필요하다, 이는 왜곡된 사회의 영향을 받은 우리의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고 그 속내에는 스스로가 악하고 독해질 수밖에 없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을 가능성 또한 높다. 그래서 드라마만큼은 인간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이 통하길 바랐고 보여주길 바랐다. ‘모두의 거짓말’에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OCN]]]></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03 Dec 2019 15:15:4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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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제대로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은 ‘태연’을 비롯한 ‘소녀시대’에게만</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5112936151099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누구나 한번쯤 으스대는 ‘전설 속의 나’가 있는 법이다. 알다시피 ‘왕년에’라고 시작하는 말들은 대부분 약간의 사실에 어느 정도의 부풀림이 들어간 허구이지 않나. 이처럼 으레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새 스스로 과거의 기억을 확대 편집하기도 하는데 ‘소녀시대’ 멤버가 될 뻔한 사람이라 소개했다가 당사자들의 선명한 추억에 호된 소리를 들은 ‘홍지민’이 큰 예다.

MBN 예능프로그램 ‘보이스퀸’에 출연한 그녀는 자신을 ‘어쩌면 소녀시대가 될 뻔했던, 17년 전 SM 연습생 출신’이라 소개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태연’이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바로 반박을 가했기 때문. “우리는 대중들에게 보여지기 전부터 수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고 누구나 한 번 쯤 거쳐 갈 수 있는 버스정류장같은 그런 팀이 아니에요.”  

사실 쉽게 뭐라 하기 힘든게 지난 날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가슴에 손을 얹고 되짚어 보았을 때 누구나 하나쯤 미화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조금이라도 주어진 가능성을 가지고 만약 그것이 나를 좀 더 조명해 주었다면 그 가능성이 향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하여 그녀를 이해 못하는 바가 아니다만 다수의 대중이 보는 프로그램에서 꺼내 보이기에 ‘소녀시대’란 대상은 존재감이 너무 선명했다.

그리고 여태 ‘소녀시대가 될 뻔했다’는 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 ‘소녀시대’ 당사자들로서는 땀과 눈물, 모든 고통을 흘려 가며 노력한 시간들이 만들어낸 현재의 성과를 단순히 운과 불운의 차이로만 매도하는  것으로 느껴져 불쾌해 할 수밖에 없고. 즉, 제 무덤 제가 판 격이긴 한데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를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은 태연을 비롯한 소녀시대에게만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개인 SNS를 비공개로 돌릴 정도로 이어진 거센 팬들과 일반 대중의 공격이다. 물론 ‘감히 우리의 소녀시대를 함부로 소재거리로 삼다니’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당사자가 나서서 이를 단호하게 저지했고 많은 이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다. 홍지민은 이미 판단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취하는 추가적인 공격이나 판단은 정도를 넘은 군중심리에 불과하여, 절대 정당하다 볼 수 없다.

이는 그들이 사랑하는 스타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일이다. 그러다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냐면, 마땅한 자격을 가지고 홍지민을 비판한 태연만 도리어 과하게 반응하여 연일 화제와 논란을 불러 일으킨 모양새가 된다. 군중심리의 파급력은 이토록 무섭다. 그들의 비난 어린 손가락들이 과부화되면 피해자인지 피의자인지 분간 못하고 마구 찔러대어 결국 옳고 그름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파국을 낳고 만다.

우리도 언젠가, 그리고 언제든지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을 수 있고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이란 쉽게 미화되고 편집되곤 하니까. 그러니 아무리 옳고 그름이 선명해도 어떤 치명적인 도덕률을 어긴 게 아니라면, 그리고 이미 당사자가 제대로 비판을 가했다면,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백번 양보하여 부가적인 비난과 분노는 넣어 두자. 비난과 분노가 필요할 때는 따로 있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Sat, 30 Nov 2019 20:22:1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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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모두의 거짓말’과 ‘보좌관2’의 치밀하고 통쾌한 승리가 더없이 중요한 이유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50133761510784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주된 에피소드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어느 대기업의 공장이 식수를 오염시켜 마을 사람들을 병들게 한 사건이 등장한다. 그 참상은 이야기 상으로도 매우 끔찍하여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병에 걸려 죽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으며 이는 엄마 뱃속에서 갓 모습을 드러낸 생명체도 예외가 없었다.

십수년 전의 영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현재 방영 중인 두 드라마의 소재가 그와 동일하기 때문. 시즌2로 돌아온 JTBC ‘보좌관2-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하 ‘보좌관2’)에서는 주진화학이란 곳이, OCN ‘모두의 거짓말’에서는 JQ라는 거대그룹의 전신인 정건 제철소가 오염물질을 유출하여 해당 지역의 사람들을 병들게 했다. 영화와 다른 이 둘 만의 공통점이 있다면, 정계와 유착하여 이 거대한 살인을 은폐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린 브로코비치’ 쪽이 문제의 해결은 그나마 속시원하고 깔끔했다. 협박을 받는 일도 있긴 했지만 ‘에린 브로코비치’가 겪는 주된 어려움은 식수를 오염시킨 대기업에 소송을 걸겠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재판이 길고 복잡해졌다는 것 뿐, 하지만 이마저도 지혜롭게 대처하여 피해를 입은 마을 사람들 모두 충분한 보상금을 받았음은 물론, 해당 오염물질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얻어냈다.

그로부터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의 한국이 처한 상황은 좀 더 악독해졌을까. ‘모두의 거짓말’과 ‘보좌관2’의 것은 좀 더 끔찍한 양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인체에 유해한 것들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 이를 은폐하기 위해 권력을 돈으로 사고 혹 사실을 알고 밝히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이들에게 자신의 잘못으로 무고하게 죽음의 덫에 걸려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을 잃을까, 이것만이 대단한 문제가 된다. 물질과 권력을 향한 탐욕으로 다른 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은 하고 있으나 사람이 아니라고 보아야 위안이 될 정도라 하겠다.

악은 특별한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 평범한 맥락,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 평범한 맥락이 개인의 욕망에 의해 지켜지지 않고 무시당하는 그 곳에서 태어나 또아리를 튼다. 그리고 이 욕망들의 치밀한 결탁은 또 다른 보통의 평범한 이들에게까지 덫을 놓아 모두 욕망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두의 거짓말’과 ‘보좌관2’의 오염물질 유출 사건이 유독 끔찍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즉, 비슷한 사건을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와 ‘모두의 거짓말’, ‘보좌관2’가 갖는 온도의 차이는, 그 사이 큰 걸음으로 발달한 자본주의가 키워낸 욕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모두의 거짓말’과 ‘보좌관2’가 이제껏 담아낸 악의 치밀함만큼 앞으로 그려낼 승리의 모습이 너무도 중요하다. 

욕망이 치밀하게 뚫어 놓은 악의 살길을 선의 방법이 어떻게 치밀하게 막아내는지, 얼만큼 제대로 단죄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의미는 사람들이 영화나 드라마에 그만큼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그리하여 통쾌한 결말이 우리의 실제적 현실에서도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실화를 이끌어내는 허구가 되어준다면 드라마로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겠는가.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OCN]]]></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29 Nov 2019 16:42:56 GMT</pubDate>
</item>
<item>
<title>‘동백꽃’의 가장 큰 성과, 멜로에 ‘새로운 궤적’을 그려내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9891631510564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인기 비결은 박복한 팔자란 틀에 갇혀 있던 여자가 제 운과 맞붙어 기어코 틀이 깨어지는 기적을 얻어낸다는 서사에 있다. 여타의 드라마들처럼 그러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이상향에서나 존재할 법한 사랑 가득한 인물의 도움을 얻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조력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동백이라 불리는 한 여자의 따뜻한 의지에서 비롯된 선택들이 모여 온전한 승리를 이루어가는과정은, 기존의 드라마에서 보아왔던 멜로와 차원이 다른 힘을 발휘한다.

조력자라고 남자가 뒤안길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림 받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버림 받았으나 하늘이 준 선물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백에게, 그늘에 움츠러든 모양새가 없을 리 없었을 터. 이 지점이 ‘동백꽃 필 무렵’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데, 작가는 이런 동백과 남자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을, 그러니까 남자가 동백이에게 반하는 순간을 그녀가 운영하고 있는 술집이 아닌 서점에서 그려낸다.

서점 속 동백은 세상의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끼어들 수 없는 동백이 그 자체의 예쁨을 발산하고 있어, 이를 단숨에 알아본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다이애나(과거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여성)’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의 의문은 결국 여자의 외모에 반했다는 건데 지금까지 봐 왔던 보통의 멜로와 다를 게 없지 않냐는 것. 작가는 예상이라도 한 듯 이어 동백과 남자의 두번째 만남을 이끌어낸다. 어디서? 바로 동백의 가게, 술집 ‘까멜리야’에서다. 

우리가 주목해보아야 할 건 ‘까멜리야’를 대하는 남자의 인식의 변화다. 무작정 자신의 다이애나는 변호사일 거란 억측을 펼치던 남자는 ‘까멜리야’는 근처에도 가기 싫어한다. 돈만 내면 술과 음식 뿐 아니라 여성의 웃음과 노래 등등을 살 수 있는 곳이라는 또 하나의 억측을 펼친 까닭이다. 하지만 마지못해 간 그곳에서 자신의 다이애나를 마주하고 충격에 휩싸이는데 이도 잠시, 술과 음식 외엔 다른 건 살 수 없다고 말하는 동백의 모습에 이제는 아주 홀딱,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반하고 만다.

남자는 서점에서 본 동백이 본연의 모습을 ‘까멜리야’에서도 발견한 것이다. 남자 또한 선하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지만 지금까지 보통의 세계를 살아왔기에, 보통의 사람들이 술집에 대해,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에 대해 가지는 왜곡된 틀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작가는 남자로 하여금 이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뛰어넘게 하고 싶었고, 그래야 동백의 본 모습을, 그녀가 무엇을 가졌는지를 알아봐 줄 수 있을 테니까, 굳이 첫 만남을 그 어떤 시각이나 관점도 작용하지 않는 서점에서 이루어지게 했다고 본다.

이후 작가의 의도대로 남자는 동백이 제 모습을 되찾는데 있어 중요한 증인이자 계기로서 활약을 펼친다. 세상이 제 멋대로 얹어준 그늘, 틀을 걷어내도록 자신이 본 진짜배기 동백이, 따뜻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력하여 세상의 어떤 시선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본 모습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었다 할까. 그리고 남자는 점차 깨닫게 된다. 자신이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아도 제 힘으로 닫힌 두려움의 문을 열고 나와 살인마에게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용기 백배의 여자가 바로 동백이라는 것을. 그래서 한없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맞서길 바랐을 뿐이에요, 우리가 뭘 가졌는지 꿰뚫어 봤으니까요”
영화 ‘내가 죽기 전에 듣고 싶은 말’에 나오는 대사다. ‘동백꽃 필 무렵'의 작가가 그리고자 한 멜로는 동백이 제 스스로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주어진 삶과 운명에 제대로 맞서게 하는 것이지 않았나 싶다. 동백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드라마를 시청한 수많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바랐던 마음일 테고.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전부였던 멜로에 새로운 궤적을 그려냈다는 것. ‘동백꽃 필 무렵’이 남긴 성과 중 가장 귀하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팬엔터테인먼트]]]></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 </author>
<pubDate>Fri, 29 Nov 2019 09:59:23 GMT</pubDate>
</item>
<item>
<title>‘누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재기가 가능한 현 상황’이 문제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9875821510558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지속적으로 불거져 온 음원사재기 논란이 새로운 국면을 맞닥뜨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는 누가 사재기를 했고 안 했고의 문제였다면 이제부터는 사재기라는 편법이 가능하게끔 구조를 갖춘 음원사이트들이 주된 해당사항이라 하겠다.

사건의 시작은 지난 24일 그룹 블락비의 멤버 ‘박경’이 개인SNS에 게시한, 현재는 삭제한 짤막한 글로부터다. 현 네트워크의 특성 상, 한 번 공유하고 공개된 글이나 영상은 삭제를 해도 온전한 삭제가 이루어질 리 만무하고 여기에 박경 자체가 지닌 영향력과 사안의 중대함까지 더해져, 해당 글은 허공에 있으나 여전히 다수의 대중에게 읽히고 있는, 강력한 콘텐츠라 하겠다. 

가장 흥미로운 건 접한 이들의 반응이다. 박경의 글에 담긴 내용이란 간단하게 ‘누구처럼 사재기 좀 하고 싶다’였는데, ‘누구’라는 부분에 실제 음원사이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실명이 거론되어 있고 접한 이들은 자연스레 ‘사재기’ 앞에 생략된 목적어가 그들이 부른 노래, 음원임을 추론해냈다. 그야말로 파장이 일어나지 않을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지목된 이들로서는 당연히 불쾌하기 이를 데 없어 모두 박경을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 일각에서는 의뭉스러운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박경이 현재 겪고 있는 장면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로 연예계를 하루 이틀 경험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무엇이겠냐는, 어떤 근본적인 물음이 자꾸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까지 든다. 어쩌면 그의 말에 담긴 사실의 여부보다 사재기를 한 사람들을 색출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가요계의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는 음원사이트의 구조 자체를 바로잡는 일일지 모른다고. 

그리하여 참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다. 박경이 2016년 5월에 발표한 솔로곡 ‘자격지심’이, 그의 발언에 옹호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 25일 늦은 저녁부터 차트를 역주행하기 시작하더니 26일 오전 즈음에는 상위권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지만, 이를 통해 음원 사재기의 효과가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하는 동시에, 서로 의심할 수밖에 없게끔 불법이 자행되고 있는 음원사이트 내 순위에 관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키려는 시도였다 하겠다.

덕분에 좀 더 복잡한 문제로 진입하고 말았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한 상태에 있는 박경이 그 혐의를 인정하고 인정받는다 해도 그 처벌은 개인에 대한 것이지 그걸로 사람들이 음원사이트를 바라보는 불신에 가득한, 언짢은 시선은 해결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과 같은 형태가 지속된다면 반대로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강력한 팬덤을 안은 가수의 것들만 순위에 오를 테니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가하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노래는 그 뿐일 거라고.

신뢰를 쌓는 건 어려운 데 반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무고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다면 그 죄는 박경이 감당해야 할 거고, 그가 일으킨 음원사재기 논란은 이제 해당 사이트들의 소관이다. 오죽하면 브로커들까지 존재할까. 구조의 개선이 필요한 시기임을 인정하고 직면하여, 순위를 도출하기 위한 좀 더 다각적인 방법을 갖추는 등의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재기가 가능해서 비롯된 문제적 상황에 임하지 않는다면, 무너지기 시작한 신뢰가 어떤 바닥까지 내보일지는 알 수 없을 노릇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29 Nov 2019 09:33: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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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어쩌다 발견한 하루’, 학원 로맨스 드라마의 대반격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6561141509527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만화 속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설정의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가 학원 로맨스 드라마의 새로운 획을 그으며 막을 내렸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들이 으레 그렇듯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을 잔뜩 출연시켜 이목을 끄려 하나 싶었다면 오산, 이 드라마의 주요 매력은 주어진 설정값, 그러니까 운명이 주는 비극에 매몰되지 않고 그를 바꾸기 위해 뛰어다니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있다.

학원물, 학원 로맨스 드라마라 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접하는, 아니 예상하는 감정은 유치함 혹은 식상함이다. 교복을 입은 예쁘고 잘생긴 배우들이 밀고 당기고 하다 사랑에 빠지고 방해를 받는다. 이 방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서로 다른 부의 축적으로 부모가 반대할 수도 있고 사랑의 경쟁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뭐 어쨌든, 어떤 크기의 방해인지는 긴장감을 얼만큼 높이는 지에 활용될 뿐 결국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다. 즉, 굳이 보지 않고도 알만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물론 MBC ’어쩌다 발견한 하루’(연출 김상협, 김상우 극본 송하영, 인지혜) 또한 이 모든 법칙과 요소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분명 흡족한 외모의 배우들이 교복을 입고 등장하고 서로 겪는 갈등의 주된 요소 또한 ‘사랑’이다. 하지만 기존의 학원 로맨스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을 이루기 위해선 주어진 설정값,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한계의 존재다. 이는 단순히 조건의 문제, 방해자의 등장으로 발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의 갈등이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주인공에서부터 눈코입 없는 조연까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고 움직여야 하는 세계다. 주인공 은단오(김혜윤)는 이 속에서 여타의 인물들과 다름 없이 제 설정값을 충족하며 살아와야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자신의 모습이 담긴 만화책을 발견하게 되고 그녀에게 속한 세계의 진실과 그 속에 놓인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스스로가 주인이라 생각했던 삶이 실은 아니었으며, 심지어 백경(이재욱)을 좋아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심장에 문제가 있어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것조차 작가에 의한 설정이었다. 와중에 다행인 건 일명 ‘백경바라기’로 매번 상처받으면서도 좋아했던 자존감 낮은 단오의 성격이 본래의 것과 동일하진 않았다는 사실. 바라기는 무슨,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에게 콧방귀 날릴 수 있고, 주어진 설정값, 즉, 운명에 순응하거나 굴복하기보다 맞서는 걸 선택하는, 자존감 높고 멋들어진 모습이 본래의 단오라 할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MBC]]]></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 </author>
<pubDate>Mon, 25 Nov 2019 13:28:3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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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생의 우아함을 연기하는 배우, 이정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6554131509522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요새 재미있다 싶은 드라마마다 이 배우가 있다. 영화 ‘기생충’으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확고한 인식을 심어 준 배우 ‘이정은’이다. 현재 출연 중인 ‘동백꽃 필 무렵’까지 평일 지상파 드라마에겐 한동안 꿈의 숫자에 불과했던 시청률 20%를 돌파했으니, 그녀는 ‘믿보배’, 그러니까 믿고 보는 배우로서의 흔들림 없는 위치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한 셈이다.

그녀가 대중에게 가장 선명하게 인식된 지점은 ‘미스터 션샤인’의 ‘함안댁’일 테다. 고애신(김태리)의 유모로, 둘도 없는 친구로, 보디가드로 평생을 바친 함안댁은 이정은에 의해 입체적인 모습으로 구현화 되었는데 덕분에 우리가 익히 아는 보통의 무슨무슨댁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인물로 탄생했다. 노비라고 무조건 비굴하지 않고 이왕 따라야 할 주인 따를 만한 양반으로 고르려는 배포를 가진, 노비이기 이전에 뚜렷한 생을 지닌 사람의 모양새라 할까.

늦은 나이에 로맨스도 꽃 피울 줄 알고 주인인 동시에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애기씨를 위해서라면 도처에 죽음이 널려 있다 해도 무작정 뛰어들고 본다. 그녀의 배포란 여느 장수 부럽지 않아 생의 마지막조차 영예로웠다. 어쩌면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로 끝날 뻔한 함안댁이란 인물이 이렇게 제 모습과 제 삶을 되찾고 스스로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까지 존재가치를 얻을 수 있었던 데는 온전한 함안댁이 되어 살아준 이정은의 공이 제일이다 하겠다.

이어 ‘눈이 부시게’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때론 엄마로 때론 며느리로 묵묵히 모시며 사는 엄마이자 며느리 역할을 담당하며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연기가 어떤 장면에서도 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순간에도 툭 불거지거나 별 뜻 없이 확장되는 법이 없어, 그저 진짜 엄마, 진짜 며느리 같았다.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남편과 오래 살아 그것마저 닮아 버린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의 모습을 우리 곁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동백꽃 필 무렵’을 보기 전까지는 이정은의 엄마로서의 역할은 거듭되어 와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여겼다. 탁월한 연기력을 보자면 차라리 ‘기생충’이나 ‘타인의 지옥’에서 그녀에 의해 표현된 사회의 부조리함에서 혹은 익숙한 것에서 피어나는 비인간적인 공포 등을 감상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연기는 엄마, 며느리, 고시원 주인 등 어떤 개념적 역할에 국한시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정은이 ‘동백꽃 필 무렵’에서 맡은 역할은 딸을 버린 데서 오는 고통으로 평생을 산 송장으로 살아온 엄마 정숙이다. 딸을 고아원 앞에 놓고 올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사정이란 당시의 시절이 그러하듯 가난이 주는 비참함이었다. 떼어내고 떼어내도 무섭게 달려드는 가난, 아이만은 그 가난을, 자신의 팔자라는 것을 되물림받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 보낸 고아원이었으나 이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후회할 장면이 될 줄이야.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엔 항상 죄스러움, 서글픈 울음 등이 차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정은이 그려내는 정숙의 삶은 어쩐지 비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가 짓는 정숙의 그늘은 우아하기까지 하다. 자신에게만 유독 야박한 세상 속에서도 딸을 향한 사랑으로 생의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맞부딪히고 제 목숨마저 내어줄 사랑을 보이며 결국 신의 손길까지 얻어낸 정숙의 삶이 이정은의 연기로 제대로 부각되어 모든 비참함을 이겨낸 결과다.

이정은에게 얹히면 다 똑같은 엄마, 며느리, 무슨무슨 댁이 아니었다. 이름을 얻고, 설사 이름이 없더라도 성격을 얻고 표정을 얻고 희노애락을 얻어, 하나의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버린다. 즉, 그녀가 배역의 삶을 실제로 사는 것이다. 그녀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이 극에서 얼만큼 넓고 얼만큼 좁은 자리를 차지하는지와 상관없이 저마다 생의 우아함을 머금는 까닭이다. ‘옥자’라는 슈퍼돼지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도 온갖 축사를 찾아다니며 돼지를 보고 연구할 정도로 맡은 인물, 아니 맡은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그를 위한 열정이 오늘의 이정은을 만들었고, 오늘의 우리는 배우 이정은을 선사받아 한없이 기쁘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신정헌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25 Nov 2019 13:16:53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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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빠짐 없는 주조연들의 활약이 ‘동백꽃 필 무렵’을 활짝 피우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304676150846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여러 모로 좋은 평가를 받는 드라마가 으레 지니기 마련인 요소들이 있다. 좋은 소재와 구성, 이야기의 완성도, 안성맞춤인 연출력, 출연 배우(특히 주인공)의 특출 난 연기 등, 이 중 두개 이상만 들어 맞아도 성공적이라 할 만한데, 여기에 주조연 배우들이 힘까지 합세했다. 시청률 기근을 겪던 지상파에 과거의 명예를 되찾아준 KBS 2TV ‘동백꽃 필 무렵’의 이야기다.

뭐 이런 복 받은 드라마가 다 있는지, 주인공인 동백(공효진)과 용식(강하늘) 주변에 놓인 크고 작은 배역들 중 어느 하나 빠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빠짐없이 듣는 감탄사가 있다. ’인생 캐릭터(어떤 배우에게 있어 인생에 길이 남을 만큼 훌륭하게 연기한 캐릭터)’를 만났다는 것. 배우로서 영예로운 칭찬으로, 이후로 이들은 대중에게 배우다운 배우들로 인식될 테다. 

‘향미'부터 시작해보자. ‘손담비’는 동백과 대칭 구도를 이루는 존재인 향미를 맡아, 기구한 인생살이를 탓 삼아 스스로의 삶을 가벼이 대해왔던 그녀의 서글픈 시간을 때론 무심한 표정으로 또 때론 한없이 순수한 미소로, 그리고 마지막에 다다르고서야 드러나는 그녀의 속내와 같이 아프고 아픈 눈빛으로 완벽히 그려내며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는다. 이제 누구도 그녀를 가수 출신 배우, 그러니까 반쪽자리 배우로 볼 수 없다.

동백과 용식, 각각의 엄마로 나온 곽덕순(고두심)과 정순(이정은)은 이미 입증된 배우들의 향연이라 더 말할 것도 없고, 노땅콩, 노규태존으로 사랑을 듬뿍 받은 ‘오정세'와 시어머니 앞에서도 거침없는 입담을 선보였던 현대판 평강공주 홍자영 역의 ‘염혜란'을 언급할 차례다. ‘노규태'는 야망만 컸지 철 좀 많이 없고 모자른 데다 다른 여자에게 눈까지 돌리려 했다. 그저 밉상으로 낙인찍힐 뻔한 이 인물은, 운 좋게 ‘오정세’를 만나며 얄미움과 귀여움 사이에 놓인, 어디에도 없는 마성의 남자로 재탄생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의 똑똑한 변호사 아내 ‘홍자영', 어쩌다 ‘노규태존’에 갇혀 마음 고생 깨나 했다만 이혼을 했으면 했지 절대 움츠러드는 법 없는 멋진 여성이다. ‘염혜란’은 겉모습에서부터 능력이 철철 넘치는 이 여자를, 표면적으로는 감정의 큰 요동 없는 표정과 여유 가득한 몸짓, 들을 때마다 명쾌한 그녀 특유의 촌철살인 어법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특정 순간마다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진솔한 모습 또한 놓치지 않고 담아내어, 노규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절로 ‘누나’라 외칠 만큼의 압도적인 매력녀로 완성했다.

변 소장(전배수)과 준기엄마(김선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용식이가 용감한 청소년일 때부터 지켜봐온 ‘변 소장’은 눈치는 좀 없어도 경력과 능력은 좀 있는, 용식이가 지닌 경찰로서의 가능성을 제일 먼저 알아봐 준 경찰이자 옹산 파출소 소장이다. ‘전배수'는 얼굴의 주름 하나하나에 따뜻함을 담아내는 연기 권법으로, 그의 등장만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푸근하고 안정감이 돌게끔 만들었고, 이는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옹산 어벤져스, 옹심이(옹산의 심장을 이고 가는 사람들)의 중심, ‘준기엄마’, 드라마사에서 준기엄마만큼 입체적인 인물이 또 있을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오롯이 준기엄마가 되어준 ‘김선영' 덕에 허구의 장소일 뿐인 옹산과 허구의 인물일 뿐인 옹산의 사람들이 현실성을 부여 받았다. 매순간 준기엄마로서 과하지도 그렇다고 덜하지도 않은 균형 잡힌 연기력을 보여주며 드라마 한 귀퉁이를 넘치게 채워준 김선영의 모습은 절대 잊지 못할 ‘동백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이다.

‘동백꽃 필 무렵’이 받은 복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아역배우마저 시청자들을 울린다는 것이다. ‘김강현'은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내는 하나뿐인 엄마 동백의 사랑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아직은 어리고 여린 아이인 ‘필구’를 맡아 어린 연기자 못지 않은 표현력으로 보는 이들의 눈물을 쏙 뺐다. 이쯤 되면 ‘아역’이고 ‘어린’이고 빼야 옳지 않을까. 

주연 배우들은 물론이고 조연 배우들,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배우들까지 생각하면 ‘동백꽃 필 무렵’이 현재 얻고 있는 성과는 충분히 납득되고도 남는다. 하나같이 이리 한가득 채우고 있는데 ‘동백꽃 필 무렵’이 어찌 피어나지 않을 수 있겠나. 우리에게 드라마가 지닌 따뜻한 심장을 더불어 경험하고 겪게 해준 이들의 정성스런 연기력에 감사의 뜻을 담아, 필 무렵을 한 움큼 품어낸 연기의 힘으로 앞으로의 배우의 인생 또한 활짝 꽃 피워 내길 바라고 바란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KBS]]]></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21 Nov 2019 11:51:16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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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유승준’에게 열린 입국의 가능성이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41258081507768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17년 만이다. ‘유승준’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 지난 15일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유승준이 LA총영사관을 상대로 낸 비자 발급 거부 취소 소송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의 과거 입국 금지 결정에 얽매여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은 위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제 유승준이 돌아오는 데까지는 대법원의 최종 확정 판결과 법무부와 법무청의 입국 금지 조치 해제만 남아 있다.

유승준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상의 자리에서,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병역 기피라는 우리나라에선 절대 용인될 수 없는 죄목과 함께 추락했다. 여기서 추락이라 함은, 외국에서도 활동은 했으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유승준’ 이름 석 자를 스타로서 존재하게 만든 한국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한 상황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이중국적을 가진 이들이 군대를 가지 않기 위해 한국인임을 포기하는 일은 비틀리고 부패한 사회구조가 낳은 문제로, 정서적 박탈감을 안겨주는 상당히 심각한 행위다. 경제력 좋은 부모 만나 두 개의 국적을 가질 수도, 그 덕분에 군대를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이들의 존재는 국가가 건넨 의무를 최선을 다해 치르고 있는 보통의 우리들에겐 하나의 사회적 상처로 작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타는 기이하게도 어떤 재력이나 명예에 의해서가 아닌, 보통의 우리들, 대중의 힘으로 사회의 상층부에 오른 이들이다. 물론 각자의 재능과 노력도 상관한 결과이긴 하다만 대중의 신뢰와 인정, 사랑을 계단으로 삼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곳이 스타라는 위치이니까. 유승준은 가수로서의 실력도 출중했지만 성실함과 겸손함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대중의 탄탄한 신뢰를 얻었던 인물이다. 그의 인기는 그의 인격이 지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믿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 지 몰라도 유승준만큼은 우리의 신뢰를 져 버리지 않을 거라고, 박탈감 혹은 회의감을 안기지 않을 거라고. 유승준을 향한 이 한 치의 의심없는, 곧고 완벽한 믿음은 그의 병역 의무 이행 여부에서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는데 당시 그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척도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유승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에 담긴 이 무게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곧고 완벽한 믿음에 반하는 길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

곧고 완벽한 것이 깨질 때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어떤 유연성도 발휘하지 못하고 남김없이 와장창, 무너져 버리는 까닭이다. 2015년 유승준이 LA총영사관에 비자 발급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이를 소송으로 가져가자, 사람들은 돈 벌러 한국에 들어오고자 애 쓰는 것이라며 비난세례를 퍼부었다. 그가 언급한 자녀에게 고국을 되찾아주고 싶은 마음, 고향 땅을 향한 그리움, 과거의 잘못에 섞인 오해 등은 대중에겐 그저 거짓된 본심이자 핑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유 씨처럼 마흔살이 넘은 동포는 국익을 해칠 우려가 없는 한 체류자격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무대를 활보하던 젊디 젊던 유승준도 이제 마흔살을 넘긴 동포가 되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그를 향한 대중의 마음이란 여전히 얼음장인 걸 보면 신뢰로 쌓은 자리에 오른 이들이 저지른 기만의 대가는 이렇듯 크고 무섭다. 

그러니 법적으로 입국의 가능성이 열리고 실제로 한국 땅에 들어온다 해도 끝난 게 아니다. 유승준에게 입국이 가능하게 된다는 건 비로소 본격적인 노력을 할 기회를 얻게 되다는 의미일 따름이니까. 사회에 기여를 하든 무엇을 하든 깨지고 무너진 신뢰를 수습할 방도를 찾아 대중의 마음에 얹힌 두터운 얼음을 녹여낼 노력을 하는 것. 이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멀고 험하여, 녹록지 않은 과정이 될 터이니 마음 한 번 단단히 먹어야 할 게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DB]]]></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19 Nov 2019 10:10:08 GMT</pubDate>
</item>
<item>
<title>‘동백꽃 필 무렵’의 그 곳, ’옹산’에서 살고 싶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3804850150697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KBS 2TV ‘동백꽃 필 무렵’(연출 차영훈, 극본 임상춘)의 배경이 되는 옹산은 참 이상한 곳이다. '옹산의 심장을 이고 가는 사람들’, 일명 ‘옹심이’라 자칭하는 동네 언니들은 새로이 정착한 동백이를 못 잡아먹어 그렇게 안달이더니, 타지에서 온 이가 동백의 정보를 캐묻자 으름장을 놓으며 내쫓는다. 이 뿐인가. 살인마 까불이가 동백이를 표적으로 하고 있다는 소식에 동네 도장이란 도장은 다 캐고 다닐 요량의 복장으로 보초까지 선다. 

“아무래도 말이야, 동백이는 그냥 죽게 냅두면 안되겠어”

그야말로 내 동생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는, 건드릴 수 있다는 가족의 심보로, 외부인이었던 동백(공효진)이 어느새 완벽한 옹산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결과다. 생긴 이래 처음으로 상인 번영회도 동백의 술집 까멜리야에서 치렀다. 게장집 손님들 빼앗아 갔다고 동네 땅값 떨어뜨리는 술집이 들어섰다고 근처에도 오지 않던 이들이, 공공의 적 까불이를 앞에 두고 모든 갈등을 넘어 ‘애는 살리고 보자’는 단합을 이루어냈다.

어떤 면에서는 진작에 그러지 꼭 위기를 맞닥뜨려야 아나 싶어 얄궂게 여겨질 수 있다만, 인간이란 원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스타일의 종족이고, 또 가족이란 게 그렇지 않나. 귀찮다며 서로 밀어 대고 밉다며 서로 콩콩 쥐어 박다가도 누구 하나에게 어려움이나 낙담의 시기가 찾아오면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함께 고통스러워한다. 어쩌면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오고 가는 타박과 구박은, 네가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어 다행이라는 또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 때랑 지금이랑 같아요? 조석으로 다가 육년을 안면트고 살았으면 식구지”

삼십여년간을 부모없이, 친인척 하나 없이 홀로 아들 필구를 키워온 동백에게 웅산은, 그녀에게만 유독 인색하게 느껴지던 삶이 느지막히 선사한 선물과도 같은 곳일 수밖에. 온갖 텃세에도 불구하고 군말없이 6년이나 버티며 미운 정, 고운 정 다 쌓아낼 수 있었던 동력이겠다. 진정한 사랑은 위기 앞에서 꽃을 피우는 법, 아이러니하게도 살인마의 위협으로 동백이를 향한 옹산의 진심이 증명된 셈이다.

이 풍경은 특히 오늘의 우리에게 더없이 뜨뜻하게 여겨지는데, 서로 툴툴대고 비아냥 거려도, 인사를 건네는 둥 마는 둥 해도, 물건값을 조금 얹어 받는 듯 보여도 관심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몇 집 건너의 사정까지 빤히 알아, 기뻐할 일 있으면 같이 잔치를 벌이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자신의 일인 마냥 앞장선다. 몇 번 못 보는 친척보다 더 가족같은 이웃사촌들이 사는 곳, 언젠가 우리 곁에도 존재했을 우리의 옹산을 향한 그리움을 잔뜩 끌어올리는 까닭이다.

경쟁사회의 모순에 찌들어 다른 이의 행복을 온전히 축복해주는 법도, 불행을 함께 겪어내 주는 법도 잊어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동백꽃 필 무렵’의 ‘옹산’은 이제 낯설다 못해 허구의 세계에나 존재하는 ‘이상한’ 장소다. 이 사실이 서글퍼서일까. ‘동백꽃 필 무렵’을 보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잊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 옹산의 일원이 되어 웃고 울며, 잊은 것일지 모를 옛 기억들 혹은 현재 곁에 남아 있으나 잃은 것일지 모를 이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드라마와 현실의 구분은 거뜬히 해낼 경지에 오른 우리가, 이 ‘이상한’ 동네 옹산만큼은 실제로 존재하면 좋겠고, 옹산에서만큼은 살아보고 싶다. 옹벤져스, 옹심이와 함께 살아가면 다른 건 몰라도 한평생 참 뜨뜻하겠다는 생각에서다. 황용식(강하늘)이란 이상적 인물이 나올 법하고 뿌리 없는 동백이가 머물만 하다. ’동백꽃 필 무렵’이 현재 받고 있는 엄청난 사랑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 팬엔터테인먼트]]]></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15 Nov 2019 17:00:50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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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장혁’, 오늘의 우리와 ‘이방원’의 간극을 좁히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36993241506619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배우 ‘장혁’에 의해, 또 하나의 새로운 태종, 이방원이 탄생했다. 이 전까지 우리의 인식 속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긴 하나, 고려의 충신 정몽주에서부터 새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을 비롯하여 동생인 세자까지 죽음으로 내몬 그저 잔혹한 왕이었다. 물론 그가 쓴 잔혹사야 변함이 없지만 장혁의 이방원은 서글픈 눈빛으로 우리에게 이해의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JTBC ’나의 나라’(연출 김진원, 극본 채승대 윤희정)는 썩어빠진 고려를 도려내겠다 목적한 이들에 의해 새로이 일어난 나라 조선을 주요 배경으로 한다. 도려내는 행위엔 당연히 피바람이 따르고 나라 전체가 얼마나 썩었든 피 섞인 바람은 온전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가장 강한 명분(名分)을 취하고 있는가인데, 명분이란 단어처럼 정치적이고 또 인간적인 게 없다. ‘정당한 이유’를 의미하지만 속내는 결국 원하는 걸 기어코 얻고자, 하고자 하는 구실 및 핑계일 때가 태반인 까닭이다.

‘나의 나라’에서 장혁의 이방원은 고려와는 다른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아비인 이성계 대신, 역사에 악명높은 이름으로 남겨질 것을 감수하며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 정몽주를 죽인다. 이로 인해 내면에 새겨진 죄책감은 그로 하여금 조선을 향한 명분에 집착하게 하나, 정작 이성계는 서늘한 경계심을 내비치며 어린 동생을 세자에 책봉하고 왕후와 공신들은 또 다른 명분들을 내세우며 그를 몰아내기 위한 날선 공격을 펼친다.

아비의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진 세월을 동고동락한 뜻이 깊어야 할 부자지간이니까, 아버지의 애정을 원하고 바랐으니까, 굳이 믿으려 애를 쓰며 기다렸다. 그 결과가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것이라니. 실상을 확인한 애잔한 분노는 왕권강화라는 명분을 칼로 삼아 형제들과 수많은 공신들의 피를 손에 묻히는 결말을 이끌어내고, 이 수많은 피 맺힌 절규를 발판 삼아 이방원은 그토록 원했던 왕으로 향하는 길 위에 오르나 그의 눈빛엔 아비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것이 여전히 남아 있어 한없이 서글프다.

어디까지나 드라마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는 것임을 감안하고서도, 이쯤 되면 우리도 고민을 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을 어떤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지. 덕분에 신생국가인 조선의 안위가 든든히 서갔으니, 극 중 그의 말처럼 고려와 똑같은 꼴 나지 않게 되었으니 그의 정치력을 탁월하다고 여겨야 하는가. 혹은 그가 저지른 악업의 동기가 아무리 버림 받은 자의 슬픔이라 해도 결국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니 비난받아 마땅한가. 

어쩌면 태종 이방원을 두고 한번도 해보지 않았을 고민이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며 세종대왕의 아버지라는 정보에서 끝나고 말았던 역사에 관한 우리 보통의 관심을 좀 더 심도 있게 끌어내고 있다 할까. 알다시피 이러한 작업은 상당히 뜻 깊다. 기존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부여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실제적 역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좀 더 구체적인 노력을 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잘 만들어진 사극이 지닌 힘이리라.

한 나라의 건국기는 언제 보아도 흥미로워, 그동안 조선의 시작을 그린 드라마가 적지 않았다. 즉, 이미 다 아는 뻔하고 뻔한 이야기로 그칠 수 있었다는 것. 하지만 ‘나의 나라’는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원 조선 개국의 장면들을 또 다른 시점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중심에 있는 인물이 이방원으로,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인물의 세세한 이면까지 충실히 담아낸 배우 장혁의 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역사를 향한 우리의 관심까지 높여준 그의 연기력이 참 고마울 따름이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제공=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 나의나라문화전문유한회사]]]></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14 Nov 2019 11:42:0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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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프로듀스’, 그들이 훼손한 것에 대하여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34482941505693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아마도 약간의 속임수라 생각하며 시작했을 터다. 이 정도야 누구나 저지르는 것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아 했을 수도 있고, 조작으로 떨어진 아이들이야 대중의 선택을 받을 만큼 실력이 있으니 어딜 가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막연한 위로를 던지며 죄책감을 없앴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현재 그들은 오디션 프로그램 투표조작 사건으로 사기와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를 받고 구속된 상태다.

오디션 프로그램 중 가장 저명했던 Mnet ‘프로듀스 X 101’의 진정성이 결국 훼손되었다. 그것도 제작진에 의해서. 생방송 경연에서 높은 순위를 획득하며 데뷔를 유력하게 만들었던 연습생들의 탈락이 일부 팬들 사이에서 의혹을 일으켰을 때 실상을 알지 못하던 대중은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도 정도가 있다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더랬다. 

하지만 곧 이어 발각된, 상위권의 득표수가 모두 특정 숫자의 배수로 설명되는 기이한 현상은 단순히 팬들의 망상이 아니었음을, 오디션 프로그램 내에서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게 사실임을 증명했고 해당 방송국은 직접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파고 들어 보니 사건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그대로 담았다 여겨질 만큼 심각했다.

순위 조작만 한 게 아니라 극비에 붙여져야 했을 경연에 관한 정보들이 일부 연습생들에게 의도적으로 새어나갔다. 사전에 알고 연습을 해온 이들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놓이는 건 자명한 일. 그 어떤 것보다 투명하게 치러져야 할 경쟁이 더럽혀진 탓에 꿈을 향해 절박하게 뛰어든 연습생들의 노력이 한순간에 값싼 재료가 되었다. 더 충격적인 진실은 이 모든 전개가 그들의 양심에 어떠한 자극도 주지 못했는데, 해당 기획사로부터 접대를 받은 까닭이었다.

대중도 모르는 바 아니다. 방송이란 게 돈이 섞이는 일이라 온전한 진심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하는데 누군가의 진심이 걸린 가치를 소재로 활용할 때, 적어도 그 진심이나 가치를 농락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목표하는 바가 결국 신기루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향하는 게 결국 신기루라 하더라도 그들의 실재하는 진심만큼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 왜냐면 존재의 목적과 연결되기 마련인 무형의 가치가 유형의 가치에 의해 대놓고 농락당하는 모습은 대중에게 상처를 입혀, 심한 경우엔 세계를 보는 시각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프로듀스 X 101’의 제작진과 일부 소속사가 함께 저지른 죄는 악질 중의 악질이다. 안 그래도 잘 인지하고 있는 비틀린 사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재확인시키며 절망을 안겼고, 논란에 해당이 되었던 되지 않았던,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든 연습생들의 진정성을 훼손해, 힘겹게 데뷔한 이들의 활동마저 어렵게 만들었으니까. 실제로 ‘엑스원’은 겨우 미니앨범 하나 발표한 상태에서, 투표조작이 증명된 또 다른 방송분의 데뷔그룹 ‘아이즈원’과 함께 해체설에 오르내리고 있는 중이다. 

논란이 없지 않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설사 허상에 불과할지라도 일구어 온 가치가 있다면, 세계가 아무리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나뉜다 하더라도 간절히 꿈을 꾸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하면 그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순간이 분명 찾아올 거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쥔 믿음을 갖게 한 데 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순위를 조작하고 프로그램의 경쟁을 불공정하게 만든 이들이 무너뜨린 건 단순히 프로그램의 진정성이나 존재가치만이 아니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가능성을 향해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그나마 남아 있던 근본적인 믿음의 훼손, 그들이 최선을 다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안성후 기자]]]></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Mon, 11 Nov 2019 13:58:14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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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동백’과 ‘향미’를 가르는 그 간발의 차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25918591503236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자신은 오래 살 것 같지 않다던 그녀가 끝내 죽었다. 그토록 노래를 부르던 코펜하겐 한 번 가보지 못하고 최고운이란 본명다운 순간 하나 보내지 못하고 기구한 생을 마감했다. 작은 위로로 삼는 건 삶의 끝자락에 그녀에게도 동백이라는 우리집이 허락되었다는 것일 테다. KBS 2TV ‘동백꽃 필 무렵’(연출 차영훈, 극본 임상춘)에서 존재 자체가 인상적이었던 향미(손담비)의 이야기다.

“버려지고 못 배우고 돈 없고 &#48821; 없고, 그럼 그냥 이번 생은 꽝인 거지, 들고 나온 게 개패인 데 뭘 열심히 사는 척을 해, 더 구질구질하게”
 
‘물망초’라는 술집 여자의 딸로 태어나 일생을 사랑 한 번 제대로 못 받고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엄마는 제쳐두고라도 그나마 향미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가족이라고 동생 하나 있지만 받을 도움은 다 받아놓고, 자신을 머리 위로 아득바득 들쳐 업고 산 향미의 삶은 부끄러워한다. 

참 야박한 삶에서 향미가 할 수 있는 건 ‘인생 운 좋으면 제시카고 운 나쁘면 최향미인 거지, 별 거 있니?’라며, 팔자를 탓하며 더 개판 치는 것 뿐이다. 속여 돈 뜯어내고 약점 잡아 협박하고 보이는 돈 훔치고, 물론 이 모든 행위가 하나 있는 동생만큼은 자신과 다르게 사람 답게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나, 그녀 스스로 표현한 대로 그녀의 삶은 ‘팔자소관’이란 말에 얽매여 시궁창을 마구 굴러댔다.

이런 향미에게 동백(공효진)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나 동백이나 사랑 받지 못하고 큰 건 매한가지인 데 왜, 어떻게 그렇게 성실히, 진정성 있게 살아갈 수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오갈 데 없어보인단 이유 하나로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의 집에 막 들이고. 더 큰 문제는 향미 또한 그런 동백에게 어느새 매혹되어, 자꾸 자신의 삶을 되짚게 되더란 것이다. 쪽 팔리게. “언니는 세상이 막 그렇게 밝아요? 그렇게 보들보들해? 언니나 나나 도찐개찐인데 왜 그렇게 곱냐고.”

“이번 생은 살아봐야 아는 거지, 팔자가 아무리 진상을 떨어 봐라, 내가 주저 앉나”
깨달음은 참 뒤늦게 찾아온다고. 향미는 시궁창 같은 곳에서 깨금발들고 짐승처럼 살며 위했던 동생으로부터 차가운 외면을 받고 나서야, 돈을 훔치고서도 다시 돌아온 자신을 그저 받아주는 동백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동백의 삶이 향미의 것과 다르게 곱디 고울 수 있는 건 팔자에 억눌리더라도 자신의 삶을 함부로 대하지도, 주저 앉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살지도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뒤늦게나마 스스로의 삶을 향한 온전한 속죄를 다짐하나 죽음은 때를 가리지 않았다.

본명 ‘최고운’, 죽고 나서야 세상에 드러난 향미의 진짜 이름이다. 곱디 곱고 싶었으나 팔자를 탓하며 평생을 싸구려 하급 짝퉁 향미로 살아온 그녀가 삶의 말미에서 생애 처음으로 운을 얻어 자신을 기억해줄 친구이자 가족, 돌아갈 집인 동백을 만났다. 그 덕에 죽은 후에라도, 스스로에게 건넨, 사나운 팔자를 상징하는 향미란 이름을 걷어내고 속에 묻혀 있던 고운 이름, ’최고운’을 되찾았다. 세상 다 산 것처럼 굴었지만 외롭고 고단했던 그녀의 삶이 옹산, 적어도 동백에게만큼은 돈을 떼 먹어도 용서가 되는 가족의 이름으로 남은 것이다.

최고운으로 하여금 향미가 아닌 동백이 되게끔 할 수도 있었던, 향미와 동백을 가르는 그 간발의 차는 결국, 누가 뭐라하든 운이 뭐라하든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거였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의 삶에서도 매순간 일어나는 선택지다. 환경과 운에 수긍할 것인가, 그럼에도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물망초 꽃말은 뭔 줄 알아? 나를 잊지 말아요. 너도 나 잊지 마, 그래야 나도 세상에 살다 간 거 같지.” 최고운의 향미로서의 삶이, 향미로서의 말들이 유독 애잔하게 남는 까닭이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01 Nov 2019 16:04:19 GMT</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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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82년생 김지영’을 두고 벌어지는 참 괴이한 현상 [무비노트]</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25913311503231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참 괴이한 현상이다. 이 시대의 아버지,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수두룩하니 많은 것처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 편쯤 다루었을 뿐인데, 그것도 영화로, 다양한 시각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의 결과물로 등장했을 뿐인데 이를 둘러싼 반목이 대단하다. 도대체 ‘82년생 김지영’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시끄러운 걸까.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여전하다. 내용은 별다를 것 없다. 82년 봄에 태어난 여자 ‘김지영’(정유미)이 누군가의 딸에서 누군가의 아내이자 며느리,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오늘의 현실을 겪는 이야기다. 굳이 별다를 것을 꼽는다면 살아온 시간이 그녀에게 호되었는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 병을 통해 동시대의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깊게 이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이라면 페미니즘이다. 사회제도 및 관념에 여성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지 김지영의 일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까. ‘억압’이란 단어가 주는 어감이 강하여 으레 자극적인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일 터이나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어떤 장면도 해당되는 게 없다. 그저 일상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야기들로 담아내어, 보는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느끼고 깨닫게 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여성을 크게 두둔하지도, 남성을 여성의 주적인 것처럼 탓하지도 않는다. 왠지 모르게 일부 남성은 이런 패미니즘 요소가 있는 결과물을 접할 때면 마치 자신들을 절대악으로 모는 마냥 혹은 자신들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마냥 분노를 표출하곤 하는데 부풀어오른 감정을 조금만 가라앉히면 금방 알 수 있다. 남성이 아닌 비정상적으로 발달해온 사회구조를 탓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기까지가 ‘82년생 김지영’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전부다.

아무리 훑어 봐도 해당 영화를 두고 출연 배우가 욕 먹을 이유도, 남성과 여성이 편을 갈라 대립할 까닭도 발견되지 않는다. ‘국제시장’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넘어 온갖 고생 다하며 가족을 보살펴온 우리네 아버지의 고단한 생을 진하게 다룬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치뤄온 삶이라 아무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우리네 여성의 생을 스크린 안으로 끌고 온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감이 되지 않는다면, 사회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나와는 다른 시각이 담긴 영화라고 그냥 넘길 일이다. 애써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소리를 높인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반응이란 소리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는 이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 어떤 이는, 여자로 살면서 충분히 대접받고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데 애초부터 다르게 태어난 남성과의 불평등을 주장하며 불편함을 야기할 필요가 있냐며 반문을 가한 바 있다.

페미니즘의 맥락을 완전히 벗어난 반문이라 내용에 주목하진 않겠다. 우리가 정작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영화라 쿨하게 넘기며 될 일을 그러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혹은 우리네 사회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현재 우리 사회가 영화 하나에 보이고 있는,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오른 반응은 우리 내면이 이미 비틀린 사회구조를 인식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결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 해도 변화는 공포를 불러 온다. 손에 쥔 안정감을 잃을까, 되려 불평등을 경험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 이는 한낱 허구의 문학작품 혹은 영상매체에 불과한 ‘82년생 김지영’에게 일각에서 보이는 과민반응의 시작점이다. 즉, 소설 혹은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작품이 화제가 되고 있는 사회의 흐름이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게다. 그러니까 현재 ‘82년생 김지영’이 맞닥뜨리고 있는 괴이한 현상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움직임을 감지한 이들의 반발과 같다. 어쩌면 괴이하다기보다 ‘좋은’ 현상이라 보는 게 마땅할지도.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Fri, 01 Nov 2019 15:55:3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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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조선로코-녹두전’에서 ‘나의 나라’, 사극을 차지한 연기 유망주들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24134611502451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사극 볼 맛이 나는 요즘이다. 퓨전 사극이라 해도 연기에 있어서 현대극보다 어려운 건 동일하여, 웬만한 배우들의 배치가 아니고서야 볼 맛이 나기 쉽지 않았다. 최근 등장한 두 드라마는 이야기의 소재나 구성면에서의 훌륭함도 훌륭함이지만 주연에서 조연까지 모자라지 않는 연기를 펼쳐냄으로써 보는 이들마다 두둑한 만족감을 얻고 있는 중이다.

KBS 2TV ‘조선로코 - 녹두전’과 JTBC ‘나의 나라’ 이야기다. 더 놀라운 건 이 중심에는 예상치 못하게 젊은 배우들이 존재하는데, ‘조선로코 - 녹두전’에서는 장동윤과 김소현이, ‘나의 나라’에서는 양세종과 우도환, 김설현이 있다. 이들 모두, 사극이란 장르가 주는 중압감과 중견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부담감이 있을 법 함에도 표면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이 지닌 연기력을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자재로 뿜어내고 있다 하겠다.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권력 다툼이 일으킨 운명의 바람에 휘말린 인물이라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나, 어느 흐름에서도 늘어지는 일 없이 생동감만 가득하니 덕분에 보는 이들은 이야기의 흥미진진함에 시선을 돌릴 틈이 없다. 특히 장동윤과 우도환을 주목해 볼만하다. 김소현과 양세종이야 이미 여러 작품에서 뛰어난 기량을 인증받은 상태이고, 설현의 연기력은 아이돌 출신으로서 기대 이상의 것이긴 하나 아직은 성장과정에 놓여 있는 정도로 제쳐 둔다.

‘조선로코 - 녹두전’에서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장남자로 화제를 먼저 일으켰던 장동윤, 초반에는 단순히 조선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코미디인 줄 알았으나, 최근 그가 맡은 역할인 ‘전녹두’가 광해군의 잃어버린 아들(이야기 상에서)임이 밝혀지면서 단순한 퓨전이 아닌, 견고한 배경을 지닌 사극임을 깨닫게 했다. 즉, 장동윤이 연기하는 녹두는 사실상 결이 아주 섬세한 인물이 되어야 하는 셈인데, 비교적 연기경력이 길지 않은 데 비해 로맨틱 코미디와 사극 양 쪽의 특성이 잘 배합된 균형 잡힌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우도환은 여기에 압도적인 카리스마까지 더한다. 그는 현재 ‘나의 나라’에서 서얼로 태어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일평생 몸부림치는 ‘남선호’를 담당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야망으로 가득차 보이지만 속내는 아버지와 벗, 여인에 대한 사랑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서글픈 인물로 구현하기 쉽지 않았을 터. 이를 우도환은 사연이 묻어나는 얼굴과 그래서 더욱 서슬퍼런 눈빛으로 담아내는데 잘 만들어진 비극으로써 너무나 매혹적이다.

양세종의 ‘서휘’와 대비했을 때 나름의 악역이지만 온 몸에서 묻어나는 주어진 살의 비운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응원하는 마음을 먹게 한다고 할까. 게다가 거대한 연기의 역사를 지닌 중견배우들, 장혁과 안내상, 김영철 등과의 합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추어온 것인양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나의 나라’의 이야기가 탄탄한 구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극은 낯선 설정들이 대거 주어지는 세계로 본인의 연기력이 남김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장르다. 그만큼 제대로 맞닥뜨리면 대중에게 배우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장르로, 장동윤과 우도환은 꽤나 영리한 선택을 해낸 격이며 실제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시청자들로서도 만족스럽다. 상상으로 접해보기만 하던 과거의 세계를(물론 허구가 섞여 있지만 뚜렷한 관점만 갖춘다면 끌어온 자체로 의미가 있다), 유망주들 덕분에 즐거이 몰입하며 간접 경험 한 번 제대로 해보고 있으니까.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몬스터유니온, 셀트리온엔터테인먼트]]]></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Wed, 30 Oct 2019 14:31:01 GMT</pubDate>
</item>
<item>
<title>‘퀸덤’에서 '나의 나라’까지, ‘김설현’의 반란 [이슈&amp;톡]</title>
<link>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5723298011502170004</link>
<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설현’이 반란 중에 있다. 무엇을 향한 것이냐면 실력보다 매끄러운 외모로 인기를 얻었을 뿐이라는 대중의 편견, 인지도 높은 아이돌 가수 출신이란 이유로 기존 배우들이 활약하는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는 우리의 왜곡된 시선이라 하겠다.

여자 아이돌 가수들이 실력으로 경연을 펼치는 프로그램, ‘퀸덤’에서 ‘AOA’는 마마무의 ‘너나 해’를 커버한 무대로 대중에게 재평가를 받는다. 짧은 치마나 몸의 일부분을 드러낸 의상이 아닌 슈트 차림에 정장 구두, 교태 어린 표정과 몸짓이 아닌 좌중을 압도하는 강렬한 눈빛과 퍼포먼스, 여기에 여장을 한 남성 댄서들까지, 으레 걸그룹 무대라면 연상되기 마련인 모든 공식을 깬 모습으로 등장한 결과다.

물론 가장 시선을 끈 멤버는 설현이다. 설현은 여자 아이돌 가수가 어떻게 스타가 되어가는지, 가장 기본 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가수로서의 능력, 가창력이나 퍼포먼스 등의 것보다 매혹적인 외모의 덕을 많이 누린 경우라는 것이다. 각종 광고는 물론이고 영화와 드라마의 세계에까지 입성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중은 설현에게 이런 편견을 갖는다. 외모만 예쁘게 가꿀 뿐, 무대를 좀 더 잘 서기 위해, 맡은 배역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을 거라고. 솔직히 가창력이나 춤 등이 출중하다 볼 수 없고, 연기력은 더더욱 그러하다. ‘퀸덤’을 비롯하여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나의 나라’를 향한 보통 사람들의 기대치는 낮은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항상 같은 자리에 있으란 법은 없다. 설현은 ‘퀸덤’에서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눈빛과 모습으로 다른 멤버들과 함께 ‘너나 해’를 독보적인 무대로 선보이는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다. 현대극도 아닌 사극인 ‘나의 나라’에서 ‘한희재' 역을 맡아 발성과 감정 연기 등, 이전 작품에선 부족하다 평가받았던 요소들에서 탄탄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이며 극을 이끌어가고 있다.

한 마디로 그사이 가수로서, 갓 연기를 시작한 배우로서 성장을 이루어낸 것이다. 심혈을 기울인 노력이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성과다. 특히 연기의 세계는, 배우로 전업한 아이돌 가수들의 수많은 전례를 보았듯이 이미지가 좋아 첫 시작은 순탄했을지 몰라도 웬만한 열심이 있지 않고서는 자리잡기 쉽지 않은 곳이다. 운 좋으면 제자리에 있다가 아니면 퇴보하다 사라지기 일쑤라 할까.

혹자는 이야기할 수 있다. 연기란 재능이 있고 없고의 문제여서 열심을 낸다고 모두 다 배우로서의 입지를 얻을 수 있진 않다고. 어느 정도 맞고 어느 정도 틀리다. 어느 분야이든 얼마나 절박한 마음을 가지며 얼마나 간절하게 기본기를 쌓느냐에 따라 발전의 정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고, 심지어 없던 재능까지 발견되기도 하는 까닭이다.

‘나의 나라’에서 비추어지는 설현은 배우로서의 재능을 논하기에 앞서, 적어도 배우에게 요구되는 기본기에 최선을 다한 결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 작품보다 발음도 정확하고 발성 또한 듣기 좋으며 맡은 배역의 감정을 담아내는 모습 또한 어느 하나 어긋나거나 들뜸 없이 바람직하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아무 거슬림 없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그동안 설현을 그저 예쁜 외모를 소유한 아이돌 가수로만 여겨 왔던 보통의 대중에게 있어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영역에 진지하게 맞닥뜨리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어떤 진정성을 느끼게 되면서 그동안 가졌던 편견이나 선입견에 도리어 미안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녀가 우리 모두의 시선을 전복시켰다 하겠다. 그러니 대중의 왈가왈부에 흔들릴 필요 없다. 결국 승리는 제 몫에, 제 삶에 집중하며 가는 이의 것이다. ‘김설현’의 반란이 유독 인상적인 이유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Mnet]]]></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ue, 29 Oct 2019 15:16:41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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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통의 모범답안,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슈&amp;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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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자기를 드러내는 게 익숙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시대, 그러나 할 공간도 묻는 이도 들어줄 대상도 없는 시대, 가까운 가족 혹은 지인은 또 너무 가까워서, 서로의 바쁘고 고된 사정을 알고 있으니까 대화란 게 더더욱 어려운 시대다. 고작해야 sns를 통해 소통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다이나 눈을 마주보지 않고 하는 대화는 온전하지 못하여 대안이 될 수가 없다.

어느 때보다 많은 수의 작가들, 상담가들, 그러니까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해주는 이들이 온라인 상에 존재하지만, 거기서 잠시나마 위로와 힘을 얻긴 하지만, 삶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소통의 통로는 되지 못한다. 좋은 말이 가진 힘을 빌어 순간의 생각을 정화시킬 수 있을진 몰라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이며 그들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닌 까닭이다.

소통과 대화의 가치는 질문에 있다. 우리 스스로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게끔 하는 질문, 누구나 한번쯤 해본 경험처럼 어떤 이가 직접적으로 던진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복잡했던 생각과 고민들이 단순명료하게 정리되고, 심지어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우리의 사고가 근본적인 방향을 바꾸는, 올바른 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기적을 체험하기까지 한다. 

이 때의 ‘직접적’이라 할 만한 질문은 경우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상대방을 향한 관심을 기반으로 둔다. 즉, 소통의 힘은 좋은 말이나 지혜로운 조언보다 관심을 기반으로 한 제대로 된 질문 하나에서 발휘되는 것이란 의미.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시즌2를 진행 중인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유재석과 조세호의 진행방식을 들 수 있겠다.

특별할 건 없다. ’사람 여행’이란 콘텐츠를 가지고 매 회 정해진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퀴즈를 푼다. 하지만 이 특별할 것 없는 구성이 특별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유재석과 조세호가 던지는 질문에 인터뷰의 대상자가 된 사람들의 진실하고 성실한 대답을 들을 때다. 그들이 일터에서, 삶을 살면서 평소에 하던 고민과 생각들을, 뭐 그렇게 진지하게 사냐는 쓴소리 걱정 없이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우리 내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하게 된다 할까.

유재석과 조세호는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관심을 가지고,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요즘의 누구나는 그런 질문을 할 여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꿍꿍이속 없이 상대방이 지루해할 염려 없이 그저 마음 터놓고 대화를 해본 적이 얼마나 있던가. 이는 ‘나’ 스스로에게도 해당되어, ‘나’ 또한 누군가의 삶 이야기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관심이 간다고, 궁금하다고 물은 적이, 또 그 답을 들은 적이 얼마나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소통에 있어서 모범답안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어디까지나 모범답안이어서, 예능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한다고 우리에게 결핍된 부분이 채워지진 않는다. 하지만 모범답안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걸 따라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거다. 우리 또한 ‘유 퀴즈 온 더 블럭’처럼 마치 '사람 여행’을 하는 듯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이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음으로써, 성실히 그 답을 들음으로써 대화의 물꼬를 터 보자. 결핍을 해결하는 동시에 우리 안에 갇혀 있던 시선을 확장시키는 소통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리라.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 사진=tvN]]]></description>
<author>윤지혜 칼럼</author>
<pubDate>Thu, 24 Oct 2019 14:47:02 GMT</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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