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달 연대기’의 존재 가치와 지속되어야 할 이유 [이슈&톡]
2019. 09.28(토) 16:49
아스달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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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아스달 연대기’의 존재 가치를 원시 부족의 모습이나 삶의 형태를 대중 드라마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맥락 내에서만 찾는다면 오히려 역부족이다. 새로운 도전이란 점에선 높이 살 만하나 솔직히 이로만 본다면 고증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으니까. 우리가 ‘아스달 연대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드라마의 맥을 붙드는 물음, 문명화되었다고 해서, 세련된 삶의 양태를 가졌다 해서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을 하는 이들보다 더 성숙하고 고상한 존재라 볼 수 있냐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태고의 땅 아스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아스달 연대기’는 부족국가에서 나라, 왕이 다스리는 고대 국가로 넘어가는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다. 즉, 권력이나 정치, 부와 욕망 등의 개념들이 서서히 인간들 사이로 들어오던 때로 흥미로운 것은 먼저 문명이 발달된 곳일수록 더욱 빠르게 수용하여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지배하려는 욕구로 발전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이 생리는 지배당한 쪽에도 빠르게 퍼져나가 짓밟힌 만큼 또 다른 누군가를 짓밟고 빼앗으려 한다.

그렇다고 모두가 동일한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땅을 가진다는 개념도 강력한 무기도 없었던 와한족 출신의 탄야(김지원)와 은섬(송중기)은 배신과 탐욕, 살육으로 가득한 세계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도 사람이란 사람들 속에서 서로 마음을 나누며 하늘이 준 사명을 다하여 살아야 한다는 와한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그런 탄야와 은섬의 눈엔 오히려, 보석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은 한낱 배설물보다 못하게 여기고 똑같은 사람을 계층으로 나누며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꿈 꿀 권리를 강탈하는 아스달의 세계가 끔찍하고 괴이할 따름이다.

부족을 없애고 아스달을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왕이 되려 하는 자 타곤(장동건)은 탄야에게 이전까지는 각 부족의 이름으로 불렸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새로운 명칭을 요구한다. 이에 탄야는 되묻는다. 결국 왕의 권력에 짓밟힐 사람들을 부를 이름을 지으라는 거냐며, 이런게 나라라면 나쁜 것 아니냐며. 하지만 탄야 또한 타곤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입장이기에 짓지 않을 수는 없고, 고민 끝에 그녀는 왕에게 고통을 당할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있어 최선이 될 만한 이름을 지어낸다.

어느 날 와한에서 자신이 들었던 말처럼, 어느 누구도, 심지어 노예가 된 아이일지라도 백가지도 넘는 꿈을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의 ‘백성’. 탄야가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고 이룰 수 있게 하는 곳이었던 거다. 이는 은섬도 마찬가지. 가만히 있다가 잡혀 팔려갈 게 뻔하다는 불안함과 두려운 속에 동족을 잡아 팔아 넘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부족, 아고족에게 다시 형제가 되어 하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이루게 했으니까.

드라마 전체의 주제와 상통하는 부분으로, 탄야와 은섬이 첫 회부터 언급된 아스달에 재앙을 가져온다는 예언의 주인공들이라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문명이 사람의 마음과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 발달의 모양새가 아무리 화려하고 강력하다 해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법. 아마도 ‘아스달 연대기’는 탄야와 은섬에 의해 왕은 모든 것을 빼앗고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며 나라는 그의 지배를 받기 위해 존재한다는 개념 위에 세워진 아스달이 무너지는 방향으로 흘러갈 테다.

그리고 원시 부족, 와한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운명의 치열한 훈련 아래 나라와 왕의 올바른 의미를 터득 중인 탄야와 은섬에 의해 새로운 문명 국가가 세워지리라. 우리가 익히 아는 널리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기치를 내세운 바로 그 나라가. 이게 우리의 첫 시작을 그리는 판타지라니, 어쩐지 마음이 으쓱하지 않는가. ‘아스달 연대기’가 지속되어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티브이데일리 윤지혜 칼럼 news@tv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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