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배우 백지원의 이름을 듣고 곧바로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풍문으로 들었소'의 유신영 변호사, '밀회'의 왕 비서라는 설명이 덧붙여지면 "아, 그 배우!"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작품 속에 스며들 듯 인물 그 자체를 연기하는 백지원은 데뷔 20주년을 맞은 지금도 연기자의 기본에 충실한 '진짜 배우'였다.

백지원은 현재 방영 중인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극본 정성주·연출 안판석)에서 만삭의 유신영 변호사를 연기하고 있다. 유신영은 한송의 세금 관련 업무를 처리하며 대표 한정호(유준상)의 비리를 덮어왔지만 결국 그에게 유모를 빼앗기고, 을의 비참함을 느끼며 갑이 되고자 민주영(장소연)과 손을 잡는 인물이다.

백지원은 데뷔 20년 차인 연극배우다. 극단 연우무대의 자유단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서고 있다. 그런 그가 안판석 PD, 정성주 작가 콤비와 인연이 닿은 것은 드라마 '세계의 끝' 덕분이었다. 당시 단역으로 출연해 안판석 PD와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어 '아내의 자격', '밀회'에 출연하며 브라운관에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특히 '밀회'에서는 왕 비서 역을 맡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개성 있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풍문으로 들었소'까지 출연하게 됐다고. 하지만 그는 여러편의 드라마 출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밖에 나갈 때도 메이크업을 안하고 그냥 나가서 알아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특히 요즘에는 대본 연습 때문에 집 안에만 있어서 드라마의 인기를 실감하지 못 했다"라고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백지원은 세무사 출신 변호사 유신영의 모습을 오롯이 연기하기 위해 대본 연습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자료 조사를 거쳤다. 그는 "변호사가 읽는 책들을 찾아 읽지는 않았지만 변호사 사무실은 주로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지,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무슨 업무를 하는지 등을 조사했다"며 자신만의 독특한 자료조사 방식을 밝혔다. 오히려 작품에서 한 발 벗어나 인물이 살아가는 배경이나 환경에 집중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변호사인 척하고 당장 몇 달간 변호사에 대해 공부한다고 해도 그분들처럼 할 수는 없다"며 "대신 내가 가진 전문성 자신감을 접목 시키려 한다"는 자신만의 연기관을 내세웠다.

하지만 백지원은 드라마의 인기 덕분에 촬영이 즐겁지 않느냐는 질문에 "몇 주전까지만 해도 인간 백지원과 유신영이라는 캐릭터가 맞닿는 지점이 생겨서 고통스러웠다"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유신영은 회사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등 뒤에는 칼을 숨기고 미소를 짓는 인물이다. 그는 "유신영을 연기하면서 자꾸 예민해지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을 가져야 하는가를 현실에서도 자꾸 고민하게 되더라"며 "그래서 묘하게 씁쓸했고 한동안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웠다. 극중 유신영이 대표 한정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을 더 열심히 해보고, 비장의 카드도 꺼내보고, 끊임없이 어필을 하는데도 결국 비주류로 남지 않느냐. 그 상황이 고통스러웠다"라고 말했다.

백지원은 대학 시절 원예학을 전공했고 동아리를 통해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연극 영화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로 인해 부족한 인맥 등으로 힘들어했다고. 당시 그는 '만약 내가 연영과 출신이라면 배우로서 더 많은 기회가 오지 않았을까?'라는 의문 때문에 많은 자괴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유신영을 연기하다 보니 연극을 막 시작했을 당시의 감정 같은 것들이 다시 올라왔다"며 "불필요한 생각인 건 알지만, 역할에 몰입하다 보니 나 자신과 캐릭터가 그렇게 만나기도 하더라. 색다른 경험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백지원이 전력을 다해 연기하고 있는 유신영은 극중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을'이다. 유신영은 분명 '갑' 한정호 앞에 놓인 '을'이지만, 한정호의 집에서 한인상(이준) 서봄(고아성) 부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을들과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다. 그 역시 처음에는 캐릭터의 방향성에 의문을 가졌다고. 그는 "처음 대본을 본 후에는 유신영이라는 인물이 '을' 집단에 녹아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연기를 하다 보니 유신영은 그냥 '소통하지 않는 을'로 남게 되더라. 그 또한 수많은 인간군상 중 하나를 묘사한 것 아닐까 싶었다"라고 말했다.

백지원은 그간 배우로 살면서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파워게임 같은 것에서 자유로웠다고 밝혔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견 박쥐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는 유신영은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이었다고. 하지만 유신영을 연기하기 위해 세무사와 변호사의 삶을 연구하면서 그는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더욱 확실하게 느꼈다고 했다. 그는 "현실에서는 능력만으로도 '갑'이 될 수 있는 분들이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유신영은 극중 설정상 결국 인맥 네트워크라는 벽을 깨지 못해 회사의 비주류로 남는다"며 "그런 인물을 연기를 하다 보니 항상 날이 서있는 캐릭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라고 밝혔다.

백지원은 극중 유신영이 회사에서 느끼는 긴장감을 촬영 현장에서도 느낀다고 고백했다. 특히 안판석 PD는 그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끔 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는 안 PD에 대한 무한 신뢰를 드러내며 "감독님은 항상 배우들과 소통을 하시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현장을 지휘하시고, 배우들의 고삐를 당겨주시는 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보통 현장에서 대본을 받으면 바로 확인하고 재빠르게 외우고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며 "그래서 간혹 미흡한 부분이 생길 수도 있는데, 안판석 PD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맡은 부분에 100% 책임감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주신다"라고 말했다.

또한 백지원은 안 PD의 콤비인 정성주 작가에 대해 "소녀 같다"는 평을 내렸다. 그는 "작가님을 보면 주위에 반짝거리는 빛이 있는 것 같다"며 재기 넘치는 그의 모습에 놀랐다고 말했다. 특히 그 놀라움은 대본을 접할 때 배가 된다고. 그는 "작가님의 대사에는 실제 2, 30대가 쓸 것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아무래도 연구를 따로 하시는 것 같다"며 "배우들 역시 대본을 보고 '작가님이 이런 말을 아셔?' '요즘 애들이 이런 말을 써?'라고 되물으며 놀라는 경우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백지원은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풍문으로 들었소' 팀의 현장 분위기를 전하며 남다른 팀워크를 자랑했다. 그는 "촬영장 분위기가 정말 좋다"며 "체력적으로 지치는 분위기는 있지만 마지막인 만큼 힘을 내고 있다"며 "촬영장 컨테이너가 붙어있어서 서로 분장실을 찾아가 대본 연습도 함께 하고 서로 건강도 염려해주면서 기분 좋게 촬영을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극중 자신의 상사인 유준상에 대해 "긍정 에너지가 넘치시는 분"이라며 "분장실에서는 그렇게 '힘내자, 파이팅'을 외치시고 정작 세트장에 들어서면 한정호로 변신하신다. 그래서 어떨 땐 그냥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웃음이 난다"며 화기애애한 촬영장의 모습을 전했다.

또한 백지원은 "배우들 역시 드라마의 결말을 궁금해하고 있다"며 '풍문으로 들었소' 앞으로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더했다. 극중 유신영은 현재 대산 그룹 노조 사건에 얽힌 한송의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민주영(장소연)과 서철식(전석찬), 윤제훈 변호사(김권)과 함께 작당모의를 하고 있다. 백지원은 "유신영이 민주영을 바라보며 외줄 위를 걸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민주영이 갑자기 배신을 할 수도 있고, 서철식(전석찬)이 조카 서봄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있고, 증인이 그만둘 수도 있다. 변수는 많고 유신영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며 "캐릭터의 의지대로, 뻔한 해피엔딩대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 현실감이 '풍문으로 들었소'의 가장 큰 매력 같다. 덕분에 배우들도 캐릭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낀다"라고 설명했다.

연기를 하고 있는 지금이 즐겁다는 그는 앞으로도 많은 배역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특히 그는 "기억에 남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는 "배우로서 기억이 된다는 것은 필모그래피가 쌓이면서 예전에 연기했던 인물이 떠오르는 것이고, 반대로 전작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작품에 녹아드는 배우가 된다면 그걸로 만족한다"며 배우로서 각인되기보다는 작품 속 인물로서 인식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이미지가 얼마나 더 남아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분량과는 상관없이 작품 속에서 확실한 기능을 하는 캐릭터들을 연기하고 싶어요. 이렇다 할 인맥도 없고, 얼굴이 여배우의 정석처럼 생기지도 않았지만 연기 활동은 꾸준히 하고 싶어요. 제게 오는 기회들은 다 잡아서 원없이 연기해야 나중에 후회를 안할 것 같거든요. 나이가 들어도 오롯이 살아있는 배우가 되는게 꿈이에요."

[티브이데일리 황서연 기자 news@tvdaily.co.kr / 사진=권영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