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진성 기자] 첫사랑의 여인, 대가족의 참한 며느리, 곱게 나이 든 할머니…. 이를 배우 김윤진(41)이 소화한다고 했을 때 ‘의외’라는 반응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김윤진은 그간 주로 연기했던 여전사, 형사, 변호사 등 홀로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위기를 헤쳐 나가는 ‘해결사’ 캐릭터와 어울렸으니 말이다. 여기에 국내와 미국을 오가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행보로 ‘월드스타’라는 별칭까지 얻은 그이니 지고지순한 여성, 순애보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오는 17일 개봉하는 새 영화 ‘국제시장’(감독 윤제균)을 통해 김윤진은 그런 예상치를 빗겨간다. 김윤진은 이번 영화에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덕수(황정민)의 아내이자 강인하고 온순한 어머니 영자 역을 맡았다.

지난 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김윤진을 만나 그의 새로운 시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가 2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국제시장’을 고른 까닭이 쉽게 와 닿지 않는 데에는 기존과 다른 성격의 역할을 입었다는 점 못지않게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덕수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큼 극중 그의 분량은 명성에 걸맞지 않는 수준이다.

이에 “사적인 이유부터 전하자면”이라며 입을 뗀 김윤진은 “사실 첫사랑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게 좋았다”고 다소 엉뚱하면서도 수긍 가는 답을 내놨다. 김윤진은 한 인물의 20대부터 70대까지를 연기한 이번 영화에서 덕수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꽃다운 처녀 시절을 연기한다. 그는 “모성애를 극적으로 표현한 영화들을 계속하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모성애 전문 배우’라는 얘기마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고 웃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탓도 있어서 그런 역할과는 인연이 없었죠. 또 사실 제가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도 아니고요.(웃음) 게다가 대가족 며느리 역할이라니 의외였어요. 김윤진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기대하고 시나리오를 봤는데 제가 봐도 너무 안 어울리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시지?’라면서 놀랐죠.(웃음) 오히려 다른 여배우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왜 내게 같이 하자고 하실까’ 궁금했어요. 물론 흔한 제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감사한 마음도 있었고요.”

대중도 그와 시선이 다르진 않을 테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난 뒤엔 이는 선입견에 불과한 우려였단 걸 알게 된다. 김윤진은 ‘이렇게 사랑스러운 배우였나’라는 생각을 자아낼 만큼 사랑에 빠진 여자의 순수한 모습부터 지켜만 봐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우리네 어머니상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세대별 연기마다 디테일을 더했다”는 그의 노력의 흔적이 연기 곳곳에 역력하다.



김윤진은 또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가슴에 와 닿았다”며 “촌스러운 옛 이야기 같지만 결국 우리의 근현대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입에 풀칠한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얼마나 먹을 게 없었으면 그런 표현을 썼을까 싶다”며 과거 세대의 고난을 충분히 공감한 그는 “부모 세대가 모진 세월을 굳세게 살아나간 현실”을 연기한다는 데 대한 나름의 사명감을 기저에 둔 채 작품에 임했다.

사실 김윤진이 이런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민 1.5세대인 그의 어린 시절 경험도 한몫 했다. 김윤진은 “10살 때 미국으로 넘어간 뒤 부모님을 도와 장사를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휴관한 경마장에 펼쳐진 플리마켓(벼룩시장)에서 텐트를 치고 물건을 팔았다. 당시 유행했던 젤리슈즈를 팔았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가게 문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며 당시의 이야기를 홍수 터지듯 쏟아냈다. 도회적인 이미지에 가려졌을 뿐 그에겐 어려움을 딛고 살아온 세대의 감성이 누구보다 진하게 흘렀다.

김윤진은 한미 양국에서 인정받는 위치에서 활동 중인 독보적인 여배우다.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 이를 유지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테다. 이에 대해 김윤진은 “즐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윤진은 “미국이 철저한 시스템을 자랑한다면 한국은 융통성과 인간미가 있어 좋다. 다 장단점이 있어 한곳이 좀 지루해지면 간사할 정도로 넘어다니는 식(웃음)”이라며 “좋은 점에 집중하면 된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 이후 이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는데 오히려 활력소도 되고 시스템과 사람에 대한 고마움도 생긴다”고 덧붙였다.

팬들 입장에선 그의 국내작을 1, 2년에 한 편 꼴로 만나는 데 대한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나 안타깝긴 당사자인 김윤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제시장’의 홍보책자 속 단체 포스터를 가리키며 그는 “여기서 나만 백수”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다양한 작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즉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작품이 빈곤한 형국을 또 한 번 하소연한다. “답답하고 가슴 아파요. 물론 여배우들이 정신 차려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제작진의 시야 넓힌 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김윤진도 작품 선택의 폭을 보다 넓힐 필요가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에 상업영화 위주인 그의 필모그래피를 거론하자 김윤진은 “주연배우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관객수가 많이 들 것 같은 영화를 주로 했던 것 같다”며 “성공하지 못하면 손해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나 즐겁자고 예술 하고 있을 순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작은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도 물론 있다. 여성이 중심이 된 좋은 작품이라면 출연료 없이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힘줘 말했다.



영화 ‘하모니’(2009)의 제작자이자 ‘국제시장’의 감독으로 김윤진과 함께 작업한 윤제균 감독은 최근 가진 인터뷰에서 “김윤진은 우리나라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에 가장 능한 배우”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뛰어난 역량과 함께 여전히 잠재된 가능성을 갖춘 여배우 김윤진을 보다 다양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길 고대해본다.

[티브이데일리 김진성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송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