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최하나 기자] 노동의 가치를 신성시 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그 가치는 훼손될 대로 훼손되다 못해 이제 무시까지 받고 있다. 그런 세상 속으로 이창동 감독이 노동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이창동 감독이 던진 그 물음을, 이제는 우리가 받을 차례다. 노동이 무시받는 시대, 사랑은 가능한가.
6일 공개된 넷플릭스 ‘가능한 사랑’(감독 이창동)은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녀의 남편, 두 부부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만나 서로 다른 삶과 숨은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가능한 사랑’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는 꼬박 10년이 걸렸다. 10년 전 이미 시나리오를 쓰고 프리 프로덕션까지 마쳤으나 마지막 순간에 엎어야 했던 이유는 창작자로서의 윤리적 의심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내가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할 자격이 있나,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게 얼마나 정직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뇌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통과 비극을 가까이서 들여다볼수록, 그들의 아픔을 함부로 픽션화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부딪혔던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긴 우여곡절 끝에 단편 영화 ‘심장소리’를 만들었다. 파업 중인 남편과 우울증을 앓는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 이 프로젝트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 했으나, 이야기는 운명처럼 다시 이창동 감독에게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가능한 사랑’은 오정미 작가의 제안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해고 노동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의 이야기를 들여온 것이다. 이창동 감독은 “내 이야기, 즉 내가 얼마나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해 줄 수 있나 하는 문제를 같이 이야기하는 게 좀 더 정직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제3자인 예지(조여정)의 시선을 빌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형식적으로 결합하는 액자식 구성은 이렇게 필연적으로 탄생했다.
극 중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돈 많은 남편 상우(조인성)과 살면서도 지원금을 신청해 자신의 독립성을 찾으려 고군분투한다. 이창동 감독은 이를 특정 인물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창작자들의 보편적인 현실로 바라봤다. 그는 “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 그나마 그 안에서 독립성, 그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나”라며 영화를 만드는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창작자들의 위치와 맞닿아 있음을 짚었다.
이창동 감독은 부유한 계급과 핍박받는 노동자라는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를 철저히 경계했다. 그는 “선악을 나눠서 보는 게 편하고 대립이 강할수록 카타르시스를 느끼겠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단언했다. 이어 “결국은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거나 부정되는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게 자본인데, 그런 것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 일상생활을 지배하는지 일상의 디테일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제 노동 문제는 인공지능 기술 혁명과 맞물려 한층 근본적인 위기로 확장됐다. 이창동 감독은 “노동의 문제는 경제적인 이슈가 아니라 우리 삶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짚었다. 극 중 해고를 당한 호석(설경구)이 “자기 속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대목은 노동 중심으로 이뤄진 인간의 자아, 즉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와 가족에게 어떤 효용 가치가 있는지 그 중심엔 노동이 있다”며 노동을 잃고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가능한 사랑’이라는 영화의 제목은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다. 모든 러브 스토리가 불가능한 사랑을 전제로 하는 역설 속에서 이창동 감독은 “관계가 순식간에 파괴되고 해체될 때 무엇이 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가,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즉, ‘가능한 사랑’이라는 제목은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일과 관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통찰에서 비롯된 제목이었다.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환상을 미옥(전도연)과 상우의 관계로 풀어냈다. 극 중 상우는 특별한 목적도 없이 미옥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창동 감독은 “자본은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수익을 따라가는 거다”라며 상우의 행동을 자본의 속성에 빗대어 표현했다. “그 과정에서 구조 조정도 하고 집단 해고도 하는 것처럼, 이 남자는 특별한 의도도 없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과 흔들리는 환상 속에서도 영화는 진짜 사랑의 형태를 응시한다. 너무 오랜 시간 함께해 식구처럼 무뎌졌던 미옥과 호석이 마침내 평상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달을 바라보는 순간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창동 감독은 “그런 사랑도 다른 방식일 수 있다. 그 사랑을 관객이 느꼈으면 했다”고 전했다.
영화의 결말은 다큐멘터리라는 구조적 형식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 결말이었다. 10년 전에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타인의 고통을 다루는 예지의 시선이 도입되며 결말의 방향도 명확해졌다. 이창동 감독은 “그들의 이야기를 픽션화시키지 않는 선에서 필연적인 결말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창동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호석이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 폭발하고 한 번 드러냄으로써 치유를 받았다고 생각해요. 예지의 다큐멘터리가 끝까지 완성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이 호석에게 치유의 역할을 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회의적이면 얼마든지 회의적일 수 있겠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면 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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