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김지하 기자] 한때 음반을 사고 공연을 보는 ‘소비자’였던 팬들이 이제 플랫폼에 가입하고, 멤버십을 구독하며, 티켓 구매 이력과 굿즈 소비 기록으로 시장에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K팝 산업의 무게 중심이 ‘기획사’에서 ‘팬덤’으로 이동하며, 단순한 소비자 집단이던 팬들이 이제 산업의 수요이자 공급, 나아가 투자 주체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팬들의 취향과 참여가 곧 수익 구조가 되는 경제 시스템, 이른바 ‘팬 이코노미(Fan Economy)’가 하나의 산업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

◆ 플랫폼이 만든 팬 경제의 기초 인프라

이 변화의 중심에는 팬 플랫폼이 있다.

하이브가 운영하는 위버스(Weverse)는 지난 2024년 기준 누적 가입자 1억 명을 돌파했다. 특히, 위버스의 MAU(월간 활성 이용자 수) 중 약 90%가 해외 이용자로 구성되어 있어, K-팝 팬 이코노미가 국내를 넘어선 글로벌 단위의 소비 인프라임을 증명한다.

특정 기획사 소속 아티스트를 넘어, 팬 커뮤니티·콘텐츠·굿즈·멤버십을 하나의 생태계로 묶은 플랫폼이 글로벌 단위의 팬 소비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카카오 산하 디어유(버블) 역시 팬 구독 모델의 대표 사례다. 디어유는 2024년 상반기에만 약 550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아티스트와 팬이 1:1 메시지 형태로 연결되는 이 서비스는 ‘소통’이라는 감정적 가치를 정기 구독형 매출로 전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플랫폼은 이제 단순한 팬 커뮤니티 공간이 아니라, 팬 소비의 결제 창구이자 데이터 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 팬클럽의 유료화, 이젠 선택이 아니다

국내 주요 엔터테인먼트사는 대부분 유료 팬클럽·유료 멤버십 체계를 기본 구조로 운영하고 있다.

하이브, SM, JYP, YG는 모두 공식 팬클럽 가입 시 연회비를 받고, 가입자에게 콘서트 선예매, 팬미팅 우선 참여, 전용 콘텐츠 접근 권한을 제공한다는 점을 공지하고 있다.

이는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정기적인 구독 모델에 가깝다. 과거 ‘공식 팬카페 회원’ 수준이었던 팬클럽은 이제 ‘연간 구독권’ 형태로 바뀌었고, 팬은 매년 비용을 지불해야 동일한 팬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음악산업 보고서에서 “팬 멤버십과 플랫폼 기반 수익 모델이 음원 중심 구조를 보완하는 안정적 수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 티켓이 ‘권리’가 되다…선예매와 VIP 구조

공연 시장은 팬 이코노미가 가장 직접적으로 수익으로 환산되는 영역이다.

인기 아이돌 콘서트의 경우 팬클럽 선예매가 사실상 일반 예매를 대체하는 구조가 보편화됐다. 팬클럽에 가입해야 예매 기회를 얻고, 멤버십 등급에 따라 좌석 선택 우선권이 달라지는 구조다.

한 공연 업계 관계자는 “현재는 팬클럽 가입 여부 자체가 티켓 접근권을 좌우하는 구조”라면서 “일반 관객보다 팬 플랫폼 가입자가 훨씬 유리한 시스템이며, 이는 팬덤의 충성도를 '티켓 구매 권한'으로 보상하는 직접적 구조”라고 말했다.

이 방식은 공연 수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동시에, 팬의 ‘소속감’을 소비로 연결한다. 단순히 ‘표를 사는 행위’가 아니라, 멤버십을 통해 접근 권한을 구매하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지난 2023년 기준 국내 공연·머천다이즈 시장 규모는 약 2조7000억 원 수준이다. 공연 한 편이 단순 관람을 넘어 굿즈·팬미팅·멤버십 패키지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가 시장을 키우고 있다.

◆ VIP 멤버십·패키지 상품의 일상화

최근 공연·팬미팅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인 VIP석, 백스테이지 패키지, 프리미엄 팬 경험 상품 역시 팬 이코노미의 진화를 반영한 결과물이다.

과거에는 일부 해외 투어나 특별 공연에서만 제공되던 VIP 패키지가 현재는 국내 공연에서도 일반 상품처럼 상시 운영되고 있다. 이 패키지에는 사운드 체크 관람, 하이터치, 기념 굿즈, 전용 좌석 등이 포함된다.

이로 인해 공연 소비는 ‘같은 공연을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등급의 관객으로 참여하느냐’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 굿즈는 ‘기념품’이 아닌 수출 산업

굿즈는 팬 이코노미의 또 다른 핵심축으로 급성장했다. 과거엔 공연 기념품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정식 수출 품목이자 글로벌 유통 상품으로 변했다.

지난 2월 코트라 발표에 따르면 K팝 관련 MD·굿즈 해외 수출액은 2024년 전년 대비 38% 증가했다.

CD, 포토카드, 의류, 액세서리, 캐릭터 상품 등이 동남아·미국·유럽 시장으로 동시에 유통되며, 팬덤 소비가 곧바로 무역 지표로 연결되고 있다는 의미다.

굿즈는 더이상 부가 수익이 아니라, 기획사와 아티스트의 글로벌 사업 전략 안에 포함된 정식 산업 영역이 됐다.

◆ 플랫폼이 팬을 ‘데이터’로 만드는 구조

앞서 언급했듯이 팬 이코노미가 산업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플랫폼이 있다.

하이브의 위버스, 카카오의 디어유 버블, 네이버의 블립 등은 팬의 결제 내역, 콘텐츠 이용 시간, 참여 빈도 등을 실시간으로 집계한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투어 지역 선정, 굿즈 기획, 콘텐츠 콘셉트 방향 설정 등 실제 사업 전략에 직접 활용된다.

즉 팬은 감정적 지지, 응원자인 동시에 기록 데이터의 주체가 됐다. 이러한 빅데이터는 아티스트의 IP(지식재산권) 가치를 극대화하고, 신규 사업 모델을 발굴하는 근거로 사용되며 팬 이코노미의 효율을 극대화한다.

중견 기획사에서 수년째 팬 마케팅을 담당해 온 관계자는 “팬 플랫폼에서 쌓이는 데이터는 주식 시장의 거래량처럼 ‘현재 이 아티스트에 얼마나 돈과 관심이 몰리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며 “이 숫자가 곧 향후 투어 도시, 콜라보 브랜드, 심지어 계약 조건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설명했다.

◆ 팬 이코노미의 빛과 그림자…‘충성 경쟁’과 피로감

팬 이코노미는 기획사와 아티스트에게 음원 성과와 무관한 안정적인 현금 흐름을 제공하는 구조로 자리매김했다. 멤버십·굿즈·공연·플랫폼 구독 매출이 결합되며 수익원이 다각화된 덕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소비 압박과 피로감이라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팬들 사이에서는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소비로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됐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팬 활동이 자발적 취미의 영역을 벗어나, 경제적 능력과 소비 등급에 의해 참여 기회가 좌우되는 구조로 이동하면서 팬덤 내부의 ‘금전적 계층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소비 지상주의적 충성 경쟁’은 팬 이코노미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지속 가능성 리스크로 꼽힌다.

심재걸 대중문화평론가는 “높게 쌓아 올린 팬덤은 가격보다 의미적 가치에 반응한다”라며 “단기적으로는 고가의 패키지와 굿즈가 폭발적인 매출을 만들어 내지만, 아티스트의 본질적 활동이 약하거나 저품질 상품이 반복되면 팬 이탈은 오히려 더 빠르게 진행된다”라고 봤다.

이어 그는 “작은 사건·사고 하나로 매출이 순식간에 붕괴되는 사례도 여러 차례 목격됐다”라면서 “팬 이코노미는 단기 수익이 아니라 질적 신뢰를 기반으로 설계할 때만 지속 가능한 구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정체성의 경제, 팬 이코노미는 어떻게 될까

현 시점에서 팬들의 소비는 단순한 구매가 아니다. 어떤 그룹을 구독하고, 어느 플랫폼에 머무르며, 어떤 굿즈를 소유하느냐는 곧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선택이 된다.

이 때문에 팬 이코노미는 ‘취향의 경제’를 넘어 ‘정체성의 경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팬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자신이 속하고 싶은 세계관과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참여자가 된 셈이다.

나아가, K팝 시장의 팬 이코노미는 ‘웹 3.0’(이용자의 개인정보와 데이터 등이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고 개인이 소유하는 개념의 웹) 기술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NFT 기반의 디지털 멤버십, 팬 투표 시스템, 그리고 AI를 활용한 맞춤형 콘텐츠 제공 등은 팬 활동의 범위를 단순 소비를 넘어 소유 개념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에 팬 이코노미가 단순히 수익 구조를 넘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미래 기술과 맞물려 진화하는 핵심 실험장이 되고 있단 관측도 많다.

◆ 팬이 만든 시장, 시장이 만든 팬

K팝 산업의 현재 수익 구조는 더 이상 음원과 방송 출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멤버십, 선예매, VIP 패키지, 플랫폼 구독, 굿즈 유통이 결합된 복합 팬 소비 시스템이 이미 기초 인프라가 됐다.

진화한 산업 속에서 팬은 변두리에 있는 소비자가 아니라, 수익 구조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핵심 플레이어가 됐다.

팬이 만든 시장, 시장이 다시 팬을 규정하는 시대인 ‘팬 이코노미’는 이제 K콘텐츠 산업의 부수적 현상이 아니다. 산업 구조 그 자체가 되며, 향후 K팝과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방향을 가늠하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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