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데일리 박진영 기자] ‘봄의 시작’ 3월에도 눈은 내린다. 이 눈은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짧기에 아쉽고, 아름답기에 더욱 그리워지는 이 눈이 어찌도 이리 우리네 인생과 닮았을까.

연극 ‘3월의 눈’은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다. 낡았지만 탄탄한 한옥 한 채를 배경으로 그림처럼 아름답게 살아가는 노부부 장오(박근형)와 이순(백성희)이 등장한다. 이순은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장오는 이발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이순과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이순은 이미 죽은 상태. 장오의 눈에만 그녀가 보인다. 장오는 유일한 혈육인 손자의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았다. 그리고 3월의 어느 눈 내리는 날, 장오는 요양소를 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이 때 이순은 장오에게 짜다 만 스웨터를 입혀 줬다. 장오는 허허 웃으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기약을 한 채 걸음을 옮긴다.

연극 ‘3월의 눈’은 지난 2011년 3월 초연 되었을 당시 관객들의 큰 호평을 얻은 작품이다. 거창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기 많은 유명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두 노배우가 출연해 많은 관객들을 울렸다.

내일이면 떠나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순의 투정에 장오는 어쩔 수 없이 새 창호지를 창문에 발랐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현재의 아픔은 모두 잊혀질 만큼, 아름다워서 눈물이 새어 나온다. 그저 툇마루에 앉아 있을 뿐인데,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꼬옥 안았을 뿐인데. 객석엔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하다. 이들의 마지막 모습에 행여나 폐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 관객들은 몰래 눈물을 훔친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분노와 서러움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는 인부들이 들이닥쳐 아내와의 추억이 어린 집의 마룻바닥을 뜯을 때도, 관광객들이 들이닥쳐 소란스럽게 해도 동요 없이 앉아만 있다. 그렇기에 아픔과 슬픔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이번 공연에선 병세 악화로 무대에 서지 못한 장민호 대신 박근형이 백성희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박근형은 “제안을 받았을 당시 대한민국 두 거장이 하던 작품을 이어 받는 건 좀 외람되지 않나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근 15년 만에 장오가 했던 약속처럼 연극 무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깊은 무게감으로 무대를 가득 메워냈다.

무대는 고풍스러운 한옥 집을 완벽히 표현해냈다. 누렇게 변한 창호지도, 마당 안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화분들도 그 자체로 생동감이 넘쳤다. 마치 내가 시골 집에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것 하나 진짜가 아닌 것이 없다. 새 창호지를 바르던 손길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도, 감동을 느끼고 눈물 흘리는 관객도. 침묵이 남긴 아련한 여운 속에는 ‘진짜’만 가득했다.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도 이젠 다 비우고 가게.” 꿈처럼 살았고, 꿈에서 깬 듯 돌아가던 그 날. 모든 것을 비워내고 걸음을 옮기던 장오가 했던 이 말이 오래도록 맴도는 건, 바로 ‘3월의 눈’이 아름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다. 3월 18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 공연.

[티브이데일리 박진영 기자 news@tvdaily.co.kr/사진제공=국립극단]